Thoughts on Deepening an Authentic Yoga Practice
IAIN GRYSAK
(http://spaciousyoga.com/thoughts-on- deepening-an- authentic-yoga- practice/)
이 글은 이안 선생님의 동의를 얻었으며 전종영님께서 번역하였습니다.
진정한 요가 수련의 깊이에 대한 상념들
진정한 요가는 관계 탐험이다(an exploration in relationship). 요가를 재미로 하기 보다 수행(sadhana)으로 하는 사람은 요가 선생님과의 관계, 요가 수련법이나 요가 전통,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있다.
궁극적으로 요가가 정말로 하는 일은 이 관계를 더 깊게 만든다. 요가 선생님과 요가 전통과의 견고하고 안정적인 관계는 핵심적인 요소로 요가 수련을 건강한 방향으로 이끌고 변화를 가져온다. 이 관계는 자신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하는 데 기초가 되고 도움이 된다. 수련이 깊어지는 것은 항상 관계의 깊이와 관련이 있다. 우리가 요가 수련을 더 깊이 하고자 할 때 이 점을 염두에 두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요즘 많은 요가 프로그램을 볼 수 있는데 상당수가 아주 잘 포장되어 있다. 유명하고 권위있는 요가 선생님들, 요가 자격증,‘요가 강사’ 자격, 새로운 요가 자세와 요가 테크닉, 요가와 관련된 지식, 속임수, 환상적이고 영적인 분위기의 요가 체험 등…
이런 요가 행사들은 흥미롭고 자극적으로 보이지만 돌이켜 보면 정말 이것들이 자신의 수련을 깊게 해 줄지 자신에게 묻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요가 티쳐와 전통, 자신과의 관계를 깊게 하는지, 아니면 그저 영적인 흉내를 내는 것은 아닌지, 우리의 주의력을 약하게 만들기라도 하듯 경쟁적인 상품이 넘쳐나는 세상에 또 하나의 덧없는 짓은 아닌지.
일반적으로 서양에서 깊이 있는 것은 쌓는 것(accumulation)에서 나온다고 본다. 우리가 더 많이 쌓을수록 더 많이 가지고 되고 더 많이 줘야 하는 것이다.
서구의 요가 웹싸이트를 보면(서양의 요가 스튜디오를 따라한 아시아 요가 홈페이지도 그렇고) 그 예를 볼 수 있다. 인기있는 스튜디오는 다양한 요가수업을 차려놓았다. 어떤 수업은 일반인을 위한 것이고 좀더 잘하는 수련자들은 자신의 의향에 맞는 것은 뭐든지 고를 수 있게 되어 있다. 핫요가/ 쿨요가, 빠른 요가/느린 요가, 편안한 요가/격렬한 요가 등. 요가 티쳐의 명단을 보면 많은 이름이 보일 것이다. 선생님들의 이력에는 다양한 스타일의 요가가 열거되어 있고 그들을 가르친 티쳐들의 목록은 더 길다. 한 달여 기간에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는 교사 훈련 프로그램이 있고 “가능성 있는” 선생님들은 여러 스타일의 요가를 다른 멘토들에게 훈련받고, 그들이 가르치고 싶어하는 요가를 선택하게 된다.
한 가지 전통이나 시스템 속에서 철저하고 잘 짜여진 지침을 갖춘 요가 기관을 보기가 드물다. 게다가 “한 선생님 밑에서 20년을 수련했고 그분과 함께 한 수련은 더 깊어졌기에 나는 요가를 가르칠 자격을 갖추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요가 선생님의 이력을 찾아보기란 더더욱 힘들어졌다.
어떠한 오래 지속된 관계라도 건강한 관계가 되려면 꾸준히 재조정하고 맞춰가야 한다. 요가 티쳐, 요가 전통과의 오랜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의도를 가지고 의식적으로 한다면, 헌신적이고 지속적으로 맞추어 가는 것이 앞으로 끌어주는 힘이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 자신과의 관계를 더 깊이 있게 하며 자신을 건강하고 더 쓸모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안정적인 기반이 된다.
정의에 의하면 관계라는 것은 두 개체 간의 상호작용과 교환이다. 우리가 자신과의 “관계”가 있고 요가 수련을 통해 그 관계를 깊게 할 때 서로 의사소통해야 하는 우리의 두 가지 면이 여기에 작용한다.
매튜 램스키(Matthew Remski)라는 캐나다 작가는 최근에 한 기사에서 “명상(meditation)”의 개념을 정의했다. 그 중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명상은 ‘감각을 느끼는 나(feeling-self)’와 ‘인식하는 나(conscious-self)’사이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내면의 대화를 향상시키는 점진적인 과정으로 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내게는 이 말이 우리가 자신과 더 깊이 소통하기 위해 어떻게 요가 수련을 활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 생각을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현대 사회는 우리의 마음이 생각, 관념과 창작물로 가득한 세상에서 떠돌게 만드는 것들로 넘친다. 우리가 원하지 않으면 그렇게 느낄 필요는 없다. 마음 속의 관념적 세상은 감각을 느끼는 몸(feeling body)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음이 창조해 낸 관념적 우주를 떠도는 동안, 감각을 느끼는 몸에는 귀기울이지 않도록 길들여졌다.
극도의 쾌감이나 불쾌한 감각이 느껴질 때에야 비로소 감각을 느끼는 몸이 크게 소리지르면 우리는 듣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럴 때에라도 인식하는 마음과 감각을 느끼는 몸 사이에 교감이 일어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보통 우리의 들음(listening)은 신체의 갈망을 만족시키거나 고통의 부르짖음을 재빨리 없애고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 생각과 관념이 뒤섞인 정신세계로 돌아간다.
나의 이러저러한 수련들은 지난 15-20년 간 진화하고 서로 얽혀서 하나의 절차로 통합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인식하는 마음과 감각을 느끼는 몸의 관계가 깊어지고 서로 교감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수련은 내 자신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하는 수단이다.
내가 매일 하는 여러 수련은 위빠사나 명상(vipassana meditation), 아쉬탕가 빈야사 요가, 호흡법(pranayama), 불교의 5계(the Buddha’s pancha sila), 파탄잘리의 금계와 권계(Patanjali’s yamas and niyamas)(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도덕성을 들여다보는 수행), 식이 요법 등인데, 이것들은 이 글을 쓰는 이유인 주제를 관찰하고 다듬어 나가는 다른 렌즈들이다. 이들 중 어느 하나만으로는 나의 경험, 나의 감각을 느끼는 몸을 다 훑어보기에 충분하지 않으므로 이 수련법 각각이 나에게는 필요하다.
“과학”이 물리학, 생물학, 화학, 심리학과 같은 각각의 분야로 나눠져 관찰하고 객관적인 현실을 총괄하는 것처럼 좌선(seated meditation), 아사나(asana), 호흡법(pranayama), 도덕적 계율(ethics), 식이요법 등의 영적인 수련도 감각을 느끼는 몸이라는 자기성찰적이고 주관적인 분야를 커버하기 위한 것이다.
붓다(Buddha) 가르침에 대한 일부 해석에 따르면 인식하는 마음은 끊임없이 몸이 느끼는 감각과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인식하는 마음은 몸이 느끼는 감각에 대해 갈망(craving)이나 혐오(aversion) 같은 반응을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 우리는 이러한 감각이 일어나는 과정을 대부분 의식하지 못하지만 장기적으로 영향을 받으면 우리의 정신에 각인된다. 이 반응들은 우리의 정신적인 복합성, 습관적 형태, 경향의 기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반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아마도 그 반응들이 뭔가 “하고 있다(work on)”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 불교 용어에서는 이를 빨리어로 “상카라(sankhara)”라 하고 파탄잘리는 이를 산스크리트어로 “상스카라(samskara)”라고 했다. 두 스승에 따르면 그것들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고통을 비춰볼 때 우리의 모든 고통의 근원이다.
이 습관적인 경향에 대해 할 수 있는 첫 번째 단계는 그것들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 습관적 경향들이 발생한 근원(마음과 자각하는 몸의 상호작용)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이다. 불교 위빠사나 수행의 본질은 가능하면 지속적으로 어떤 반응도 일으키지 않고서 감각을 느끼는 몸에 대해 알아차리는 것이다.
사띠파타나 수타(Satipatthana Sutta)라는 불교 경전에서 붓다는 우리가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알아차리면서 그 감각에 대해 갈망하거나 싫어하는 어떤 반응도 일으키지 않고 계속해서, 방해없이, 한 순간도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고 이렇게 할 수 있다면 7일에서 7년 안에 모든 상카라 패턴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것이라고(해탈할 것이라고) 했다. 7일이 될지 7년이 될지는 각 개인의 독자적인 상카라 패턴이 축적된 수준과 정도에 따라 다를 것이다.
해탈한다는 것은 간단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7일이든 7년이든 우리는 이 한가지를 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감각을 느끼는 몸을 객관적으로 관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이 경험을 더 깊게 해주는 진정한 수련을 사람들은 쉽사리 하려 들지 않는다. 움츠러들거나 돌아서지 않고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주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도전이다. 그래도 내가 탐험해 본 바에 의하면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지속적이고 통합적이고 유용하며 의미있는 존재가 되는 직접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자신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강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또한 세상에 있는 가장 정직한 나 자신과의 대화이다.
일단 인식하는 마음과 감각을 느끼는 몸이 서로 어떻게 교감해야 하는지 알고 나면 우리는 모든 수준에서 더 건강한 삶을 선택할 수 있다. 먹는 것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에서, 다른 존재를 포함해서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과 더 깊은 차원에서 반응하고 상호작용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나는 15년에 걸쳐 꾸준히 지속적으로 수련함으로써 이러한 혜택들이 내 안에서 자라나는 것을 지켜봐 왔다.“요가가 여러분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the yoga happening inside you).”. 이 말은 샤랏 조이스(Sharath Jois)가 요가 컨퍼런스에서 자주 하는 말인데 바로 이런 뜻이다.
이 혜택들이 붓다가 정의한 완전한 해탈로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와 의심이 든다고 하더라도 이 혜택들은 실제로 있으며 오랜 수련과 함께 증강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시중에 나와 있는 요가와 명상 수련들은 자주“은총”, “평화”, 행복”과 같은 말들로 부각된다. 한층 깊은 만족감과 꾸준함, 기능들이 이 수련의 장기적인 결과임에는 의심이 없다. 우리는 수련하면서 문득문득 행복에 젖고 도취되는 이 단기적인 경험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의식을 깊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또 감각을 느끼는 몸과 교감하기 위한 수단으로 요가를 진정으로 수련하는 사람에게는 유쾌하지 않은 체험이나 감각들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사실 이것이 장기간에 걸쳐 가장 두드러진 경험이 될 수도 있다.
부정적이고 즐겁지 않은 상카라 패턴들은 자각하는 몸을 통해 인식하는 마음의 빛으로 들어와야 한다. 그것들을 눈으로 직접 봐야 하며 상카라와 함께 있어도 완전히 편안하고 온전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때 상카라들은 약해지고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좋은 소식은 우리가 이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 끊임없는 알아차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들의 보호도 도움도 필요없다. 만트라, 축복, 향, 기도도 필요없다. 샥티파트(shaktipat)도 필요없다. 마사지사도 악령을 물리치는 퇴마사도 필요없다. 전부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곳에 있다 – 우리가 필요한 것은 그저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줄 진정한 수련을 통해서 자신의 상카라 패턴을 전적으로 알고 느끼고자 하는 의지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식하는 마음으로 강제하거나 억지로 함 없이 자연스럽게 변형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인식하는 마음과 감각을 느끼는 몸 사이에 반응하지 않는 결합이 한번 생기면 자동적으로 재정렬이 일어난다.
이것은 간단하지만 꽤 힘든 일이다. 인간은 즐거움을 따르고 고통을 피하도록 태어났다. 그래서 우리의 의식을 불쾌한 경험과 접촉하게 만드는 수련에 임할 때 우리의 본능은 도망치려고 할 것이다. 그 과정에 대한 이해, 결단, 집중과 머물겠다는 신념이 요구되며 그것이 피하고자 하는 본능적인 반응을 무마시킬 수 있다. 요가가 우리 삶과 통합되고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균형잡힌 방식으로 요가를 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더 깊은 이 작업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한 요가 스승 아래서 한 가지 방식으로 20년을 함께 수련하는 것이 드문 것이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하려 하고 수련을 통해 더 깊은 자신과 만나기 시작할 때 나는 다음의 3가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했다.
- 수련을 멈춘다. – 상카라 패턴(습관적 경향)에서 돌아서고 그것을 억누른다(Stop practice – turn away and repress sankhara patterns).
이것이 가장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수련을 멈춘다는 것은 말 그대로 그만둔다는 뜻이다. 아쉬탕가를(또는 다른 수련이라도) 그만두고 다른 요가나 다른 수련으로 바꾼다.
이것은 더 미세한 방식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선생은 학생이 더 깊이 들어가야 할 어떤 자세가 아직 숙련되지 않아서 그 특정 자세에서 학생을 멈추게 한다. 그 자세는 몸에 유쾌하지 않은 감각을 불러오고 마음은 그에 반응하기 때문에 맞서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학생은 이 선생님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기에, 덜 까다롭고 그 자세를 안 시키거나 바꾸거나 심지어 건너뛰게 해 주는 다른 선생을 찾아 옮긴다. 이 학생은 아쉬탕가를 그만둔 것은 아니지만 수련에서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한 것이다.
다른 수련자들은 자신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수련을 통해 밀고 나간다. 감각을 알아차리기 위해 수련과 함께 하기 보다는, 요가를 그저 “통과하기 위한”수단으로 삼고 스스로 무뎌지는 것이다. 아니면 TV를 켜거나 음악을 듣거나 얘기하는 등등. 이것들은 모두 진짜 작업, 즉 수련을 통해 자신과 만나는 내면적 대면을 피하는 방법들이다. 신체적으로 어떤 동작을 경험하기만 할 뿐 정말로 수련하는 것은 아니다.
- 상카라 패턴을 더 굳히고 돋구기 위해 수련에 임한다 (Use practice to feed and deepen sankhara patterns).
이것도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자기를 비하하고 학대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은 아쉬탕가는 상카라를 더 굳히기 위한 토양(fertile soil)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완벽한 체형과 우아한 수련을 보여주는 아쉬탕가 모델은 이들의 이상이다. 그들은 자신이 그린 완벽한 비전으로 밀어붙이면서 몸이 자각하는 현실을 부정하며 그 이상을 추구한다.
페이스북 셀카 시대의 위상과 요가 잡지들이 이 유감스러운 현상에 일조한다. 그 결과 식이 장애는 악화되고 무릎과 척추는 탈이 날 때까지 힘을 쓰며 마음과 몸의 균열은 갈수록 벌어져 간다.
아니면, 과장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 역시 자신들의 경향을 굳히는 데 아쉬탕가가 불모지라는 것을 발견한다. 수련으로 얻어진 힘과 에너지는 더 기교적이고 통제적으로 조정된다. 이러한 류의 사람들이 학생들이 우러러보는 선생이 되면, 그 영향은 그들 자신에게나 그들이 악영향을 끼치는 다른 사람들에게나 끔찍하다. 정도가 지나치고 물의를 빚는 선생이나 스승들의 일화가 많은데 유감스럽게도 이런 일이 드물지 않다는 것이다.
- 조용히 지켜보며 계속 수련한다(Quietly observe, and keep practicing).
누구나 인내심과 객관적인 관찰력을 기를 수 있다. 자각하는 몸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든 우리는 듣는다. 가능하면 명확하게 들으려고 애쓴다. 우리는 몸이 우리에게 말해야 하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러한 감각으로 알아차림과 함께 수련을 계속해 나가며 자연스럽게 변화가 일어나도록 한다.
신념, 집중, 겸손, 인내, 좋은 스승과 건실한 전통의 도움과 지침과 결합된 수련을 하면서 우리가 정말로 무엇을 하는지 명확하게 이해하면 상카라 패턴들을 통해 우리가 점진적으로 수련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어렵다. 그리고 받아들이고 변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어야 한다. 겸손과 다내려놓고 따르는 것(surrender)-전통과 스승, 무엇보다 감각을 느끼는 몸에 대한 내려놓음-이 필요하다.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은 안정적이고(grounded), 치우치지 않으며(balanced), 실용적이고(functional), 잘 공감하는(compassionate) 수련자와 스승들이다. 그들의 삶은 자신이 하는 바에 의해 크게 향상되어 간다.
최선의 의도를 가지고 있어도 누구나 완벽하지는 않다. 우리 모두 때때로 위의 1이나 2의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건실한 수련 공동체의 도움과 피드백, 좋은 선생님, 많은 자기 성찰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이런 지지와 의도를 가지고 지속한다면 진정으로 수련하는 데 성공할 것이며 그 수련은 우리 삶이 최고가 되도록 도와주는 뒷받침이 될 것이다
너무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가끔 아니 지금도 힘든 아사나 와 마주 할때마다 작아지는 저를 발견하고 피하고 싶고 좌절하고 해야하나 말아야하나를 생각합니다..이글을 읽고 좀더 생각없이 수련에 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도 샨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