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렬에 관한 단상…(Some Thoughts on Alignment….) – Iain Grysak

위의 동영상에서 리먼은 제가 요가를 가르칠 때 “세부적인 정렬(micro alignment)”이라고 하는 것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 중요한 이유 하나를 설명해줍니다.

아쉬탕가를 포함한 일부 요가 분파에서 매우 엄격하고 독단적인 자세의 정렬을 거침없이 주장하는 선생님들을 볼 수 있습니다. 몇몇은 자신이 물리치료학, 운동학 등과 같은 분야를 공부했던 점을 내세우면서 전통적 자세에서 해야 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을 지시할 수 있는 권리라도 부여 받은 마냥 말합니다. 이들은 자세 옳은 자세 정렬 방법과 잘못된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이 옳다고 결론 내린 방식을 모두가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천편일률”적으로 정렬에 접근하는 것이죠.

불행하게도 저 역시 이런 선생님 밑에서 수년 동안 수련을 한 적이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건강하지도, 즐겁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경직되고 부자연스러운 정렬 패턴을 강요 받았기 때문에 굉장히 깊은 육체적 트라우마를 겪었습니다. 사실 다른 학생들에 비하면 선생님의 지시사항을 곧이곧대로 따른 편도 아니었는데도요.

선생님이 된 저는 이러한 지도자 밑에서 오랫동안 수련한 학생들의 모습을 눈여겨봅니다. 제가 관찰한 바로는 이들의 통증이 다른 학생들에 비해 덜 하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은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한 이들의 움직임은 경직되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자유로움과 부드러움이 부족합니다. 이들은 직관적이고 체화된(embodied) 방식이 아니라, 지능적으로 수련에 접근합니다. 많은 경우, 오랜 기간 동안 선생님들이 자신의 신체가 가진 문제점을 지적해주었기 때문에, 자신의 수련과 스스로의 몸에 대한 자신감이 매우 부족합니다. 불신은 이들의 수련, 그리고 삶의 경험 전반을 꿰뚫는 특징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다양한 모양과 크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쉬탕가가 아름다운 이유 중 하나는,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몸, 다양한 강점과 약점을 가진 사람들이 수련을 통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쉬탕가 시리즈의 표준 자세와 빈야사를 익혀가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선생님으로서 저는 다음과 같은 목표를 세웠습니다. 학생들의 몸에서 잘못된 점이나 바꿔야 할 점을 지적하기 보단, 스스로 충분히 자신감을 갖도록 자극하고 격려하여 자신들이 본디 가지고 있는 도구를 활용해 자세와 움직임을 만들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도 정렬을 잡아줄 때가 있는데, 대게는 더 깊게 반다를 느끼도록 하거나, 지나치게 비효율적인 움직임의 패턴을 바꾸려고 할 때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걸 “교정”이라고 보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움직여보길 제안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학생이 와서 통증이 있다고 호소를 하면 보다 폭넓게 정렬을 잡아주긴 합니다만, 이는 동영상에서 리먼씨가 이야기 하듯이, 특정한 패턴이 절대적으로 맞았다 혹은 틀리다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고착되어버린 만성적 패턴을 깨려는 시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체화된 느낌과 자기 신뢰를 가질 때, 그리고 나로서 존재할 자유, 나의 고유하고도 자연스러운 신체 구조의 직관적이고 내재적인 패턴을 포용할 자유를 가질 때, 우리의 수련과 삶은 보다 활기를 가지게 됩니다.

번역 – 조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