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적 사고를 통해 보는 아쉬탕가 요가 수련에서의 통증에 대한 접근법(A systems thinking perspective on the resolution of pain in Ashtanga Yoga practice)

시스템적 사고를 통해 보는 아쉬탕가 요가 수련에서의 통증에 대한 접근법(A systems thinking perspective on the resolution of pain in Ashtanga Yoga practice)

 

이안 그라이섹(Iain Grysak)

 

제가 요통만 50년을 공부했는데요, 누가 이 통증이 어디서 유발되는지 이야기하거든 보나마나 다 허풍일거예요.

  • 알프 나츰슨(Alf Nachemson), 위의 동영상 에서 인용

 

저는 위의 동영상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메시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영상을 다 보고 나니 통증, 부상, 병리학, 치유와 같은 것들을 저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특히 아쉬탕가 요가 수련의 맥락에서 한번쯤 정리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올바른 방법으로 아쉬탕가 요가 수련 체계를 실천하다 보면, 구조적 변화 과정에서 거북함의 경험이 동반됩니다. 많은 수련생들은 이러한 불쾌한 국면을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일부 학생들은 불쾌함을 받아들이고 끈질기게 수련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조속히 통증이나 거북함을 제거하고자 곧장 외부적인 수단의 도움을 구하기도 합니다. 보통은 수술처럼 극단적인 치료법을 동원하지는 않지만, 인도 같이 의료 관광 산업이 발달한 나라에서는 하루 빨리 무릎 통증을 진단, 치료 받고 싶어하는 아쉬탕기들에게 최적화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해줍니다.

학생이 통증이 있다고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 저는 “계속 수련하세요. 한 발 물러나 잠시 수련 방법을 바꾸고, 통증이 지나치게 느껴지지 않게 하되, 계속해서 수련하세요.”와 같은 조언을 합니다. 개개인의 상황에 따라 구체적인 지침을 덧붙일 수는 있겠지만 전반적인 메시지는 같습니다. 계속해서 조심스럽게 수련 할 때 통증이 악화되지 않거나, 신체의 다른 부분으로 통증이 옮겨가거나, 퍼지거나, 점차 나아진다면 보통 저는 다른 치료는 필요 없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수기 치료를 받을 필요도, 의사 진료를 받을 필요도, 정밀 검사를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지능적이고 의식적으로 수련을 이어나갈 때 자연적으로 치유가 이뤄지며 문제 역시 자연적으로 해결됩니다.

장기간 날마다 아쉬탕가 수련을 하면서 생겨나는 통증은 많은 경우 뼈, 조직, 근막의 긴장과 구조적 패턴이 보다 심층적으로 재구성되고 바로잡히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재구성은 사실 올바른 수련의 신호이며 바람직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현저한 내적 전환을 원하지 않는다면 아쉬탕가 요가를 수련하지 말아야 합니다.

긴장은 건강한 인간 외에도 세상의 모든 안정적인 구조물에게 내재되어 있는 속성입니다. 긴장은 생명 그 자체에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세상에 저항력이 부족할 때(긴장이 부족할 때) 무질서와 혼란이 생겨납니다. (분자, 인간, 사회, 태양계를 망라하여) 복잡한 구조가 안정성을 유지하고 혼란과 무질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체계에서 -긴장을 포함한- 얼마간의 조직된 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모든 긴장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죽음과 분해를 경험한 인간입니다. 죽은 인간을 구성하고 있던 요소들은 또 다른 안정적 구조체계에 흡수 될 때까지 계속해서 혼란과 무질서로 해체됩니다. 죽음이야말로 유일하게 진정 모든 긴장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수련의 목표는 우리의 몸과 마음의 긴장 패턴을 재조직하고 바로잡음으로써 우리가 일부가 되어 살아가는 환경과 원활하고 안정적인 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반다(Bandha)는 인간에게 있어 최적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다 상태에서는 서로 반대되는 힘이 균형을 이루며, 골반 하부나 모든 관절들을 지탱하는 핵심적인 근육과 같이 신체의 가장 깊은 “구조적” 막(layers)을 따라 긴장이 이동합니다. 이러한 막은 지구 및 중력장의 힘으로부터 우리를 변함없이 안정적으로 지탱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입니다. 또한, 반다 상태에서는 슬리브 근육(sleeve muscles)으로부터 긴장이 제거됩니다. 슬리브 근육이란 본디 자유롭게 움직이고 반응할 수 있도록 “고안된” 근육입니다. 따라서 반다란 긴장과 이완(또는 속박과 자유)이 역동적인 균형을 이룬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로 인해 인체 구조에서 건강하고도 원활한 텐세그리티(tensegrity, 역자주: 긴장 속 이완, 혹은 이완 속 긴장. 긴장과 이완이 잘 조화를 이루는 상태)의 패턴이 조성됩니다. 저에게 있어 아사나 수련의 목표는 이러한 기능적인 패턴을 다시 형성시키는 것입니다.

자세에는, 일시적으로는 구분되지만 서로 연관되어 있는 두 가지 상태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일상에서 매 순간 자세를 취하면서 만들어지는 일시적인 상태입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피상적이고 일상적인 상태이며, 이 때 근육과 신체 조직은 대게 비교적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동작(혹은 멈춤)을 반영하게 됩니다. 둘째는 장기적인 상태에 관한 것으로, 살면서 만들어진 보다 깊은 구조적 습관이나 패턴을 반영합니다. 경향적으로 이러한 자세는 선천적인 유전적 특성 외에도, 살면서 일시적으로 취했던 자세들이 누적되어 습관이 된 결과이기도 합니다. 장기적인 형성된 자세는 (바꾸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보다 심층적이고 고정된 신체의 긴장 패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체-정신 구조에서 긴장과 이완의 힘을 조직하는 텐세그리티 패턴은 자세에 반영됩니다. 일시적 자세와 장기적 자세는 상호적인 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줍니다. 각각의 일시적 자세는 인체 체계에 입력되며, 이는 다시 보다 고정적이고 장기적인 자세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일시적 자세가 장기적 자세의 경향과 비슷할 경우, 일시적인 상태는 장기적인 경향의 구조를 보다 강화하고 뒷받침할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일시적 자세가 장기적 자세의 경향과 상이한 요소를 지닐 경우, 일시적 자세 상태는 장기적 경향의 텐세그리티 패턴을 바꾸거나 전환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상태의 관계는 반대로도 작용합니다. 즉, 장기적인 경향의 패턴 역시 매 순간 일시적인 상태와 관련해 자세를 취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저는 아사나-빈야사 수련의 역할이 매일 수련을 할 때 의식적인 각성을 토대로 아사나와 빈야사 자세를 만드는 데 있다고 봅니다. 아울러 이러한 수련은 장기적인 자세 패턴과 비교하여 일시적인 자세가 보다 건강하고 기능적인 텐세그리티 패턴을 가지도록 해줍니다. 각 아사나와 빈야사의 일시적 상태는 장기적인 구조의 경향이 보다 건강하고 기능적인 자세로 나아가 바뀌도록 도와줍니다.

아쉬탕가라는 특별한 수련법에서는 동일하고 반복적인 텐세그리티 패턴을 만들기 위해 근력, 유연성, 의식이 동원됩니다. 이 과정을 매일 규칙적으로 반복하다 보면, 새로운 일시적 움직임의 패턴을 지탱하기 위해서 장기적인 자세의 경향을 반영하는 인체 심층적 구조의 텐세그리티 패턴 역시 전환되고 바뀔 것입니다.

반다가 제자리를 잡아 에너지가 상당한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각각의 자세와 빈야사를 수련하다 보면, 장기적이고 경향적인 자세에도 차츰 반다의 속성이 자연스럽고 순조롭게 반영될 것입니다. 반다의 상태에 머무를 때 우리는 중력의 장과 보다 조화롭고 원만한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가령, 별 생각 없이 서 있을 때와 반다를 만들어 사마스띠띠(samasthiti)로 섰을 때를 비교하면, 후자 쪽이 키가 더 커지고 공간도 효율적으로 조직할 수 있습니다. 매일 수련을 하면서 매 순간 자세(아사나와 빈야사)에 반다를 잘 적용시키는 수련생들은 키가 조금씩 커지기도 합니다. 이는 저 또한 직접 경험한 바이기도 한데, 편하게 쉬는 자세에서 키를 비교해보면 매일 수련을 하기 전보다 몇 센치 더 커졌습니다. 저와 오랫동안 수련하고 있는 학생들에게서도 같은 변화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아사나 수련을 통한 텐세그리티의 구조적 패턴의 장기적 전환과 변화 과정에서는 통증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수련을 하는 학생들은 이따금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장기적으로 심층적인 텐세그리티 패턴을 바꿔나가는 것은 건강하며 이롭지만, 단기적으로 그 과정에서 생기는 경험은 거북할 수 있습니다. 나의 신체 구조 조직 패턴에서 어디가 심층적으로 변화해야 키가 커지게 될지 떠올려보면, 과정상 통증이나 거북함 없이 변화가 생기기 어렵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도 계속 수련을 이어나가는 것이야 말로 거북함을 해결해 나가는 최선의 방법(이자 대부분 유일한 방법)입니다. 매일 수련 속에서 짧게 자세를 꾸준히 반복하다 보면 장기적이고 경향적인 자세는 계속해서 진화해나가며, 마침내 새롭고도 안정적인 구조(conformation)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전환기 동안 우리가 경험하는 통증에는 나름의 “지능”과 기능이 있습니다. 수련을 접음으로써 이 과정을 멈춰버리거나, 상이한 요소(가령 아사나 재편성, 바디워크, 수기 치료, 수술 등)를 더함으로써 이 과정을 교란시켜버린다면, 이는 장애 요인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일부 경우에는 통증이 악화될 수 있으며, 몸-마음 체계의 다른 부분으로 통증이 옮겨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계속해서 매일 하는 수련의 친숙한 요소들을 몸에 새긴다면, 장기적이고 경향적인 자세 역시 아쉬탕가 시리즈의 친숙한 요소들의 지능에 맞는 방향으로 진화하게 됩니다. 결국 장기적이고 경향적인 자세는 새롭고도 안정적인 구조로 정착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 도달했을 때 변화 과정에서 생기는 통증 역시 자연스럽게 가라앉게 됩니다. 신체가 계속해서 바뀌고 새로운 구조적 상태로 안착되면서 매일 조금씩 통증이 옅어지다 점차 가라 앉을 수도 있고, 수련에서 어떠한 동작을 하거나 오후 늦게 쉬다가 순간적으로 통증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통증이 어떤 식으로 사라지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꾸준한 수련(즉, 변화를 가져오는 짧고 동일한 구조 요소를 계속해서 몸에 새기는 것)이야말로 이러한 해결책의 실마리입니다. 사실 이러한 조언은 많은 수련생들(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가진 직관과는 어긋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통증을 경험할 때 사람들은 보통 ‘1) 당분간 수련을 중단해야 한다’, ‘2) 의사의 진찰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의사들은 상태가 나아질 때까지 휴식을 취하고 요가 수련을 피하라고 조언합니다. 하지만 제가 앞서 나열한 이유들을 미뤄보자면 이는 장기적으로 효과적인 해결책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요즘 의사들은 엑스레이나 정밀 검사를 권하기도 하는데, 이를 통해 디스크 퇴행, 탈장, 인대, 힘줄 또는 연골 파열을 진단할 수는 있습니다. 위의 동영상에서 말하듯, 상당한 수의 “보통” 사람들은 이러한 “질병들”의 일부 또는 전부를 지니고 있음에도 별다른 통증을 못 느끼고 삽니다. 한편 통증을 가진 아쉬탕가 수련생(또는 수련 여부와는 상관없이 일반인들)이 정밀 검사를 통해 구조상 병리학적 증상을 진단받을 경우, 통증을 중심으로 다양한 물리적, 정신적 딱지와 제약들이 붙게 됩니다. 이 경우 이들은 현상적인 경험은 덮어두고, 지적인 이론들을 토대로 수련과 일상에서의 움직임에 제약을 가하게 됩니다. 자신들이 수행할 수 있는 동작들은 두려움과 공포로 점철되며, 자신들의 위태로운 상태가 악화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사고방식과 신체적 제약들은 치유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아쉬탕가는 시스템 지향적인 수련이기 때문에, 그러한 관점에서 효과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연과 우주에 관한 시스템적인 관점은 비교적 최근에 발전하고 진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본 관점은 학문 공동체에서도 서서히 힘을 얻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이를 생명과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하고도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봅니다. 시스템 지향적 관점은 환원론적인 방법론을 넘어서는 것이며, 지난 수 천년 동안 동서양에서 현실을 이해하고자 만들어낸 접근법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사건 지향적 사고

단선적으로 사고함

시스템적 사고

순환적 구조로 사고함

사건 지향적인 사고에서는 모든 것들이 사건들의 인과적 연쇄를 통해 설명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A와 B와 같은 근본 원인은 인과의 사슬에 방아쇠를 당기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시스템적 사고에서는 피드백 회로 구조로부터 어떤 체계의 작용이 발생하게 된다. 근본 원인은 단일한 점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으며, 특정한 피드백 회로에서 발생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http://www.thwink.org/

 

환원주의는 전체를 구성 요소들로 쪼개고, 각각의 요소들의 특성을 분석함으로써 하나의 현상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전체적 속성의 근본 원인이 부분들의 속성에 있다고 보는 것이죠. 이는 서구 학문에서 수 백 년 동안 해왔던 것이며, 불교와 같은 동양 종교와 철학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서구 학문과 불교 철학은 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정교하고도, 값지고, 유용한 관점을 가져다 주었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효과적으로 설명해주지는 못했습니다.

아사나 수련과 그것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이해할 때 역시 환원주의가 자주 사용됩니다. 대표적인 아사나 환원주의자로 BKS 아헹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아헹가는 자신이 크리슈나마차리야로부터 배운 아쉬탕가 체계에 분석적으로 접근하여 이를 구성 요소들로 쪼개었습니다. 즉, 빈야사 체계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아사나들의 시스템적 관계를 해체시키고, 각각의 아사나를 자체적 시스템으로 바꾸었습니다. 또한 각각의 아사나 역시 분해시켜 하나의 자세에서 활용되는 근육, 뼈 등의 개별적인 구성 요소들로 나누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하나의 아사나가 개별 신체 부위에 미치는 효과들에 주목하여, 이것이 인간의 전반적 기능과 건강에 어떠한 기여를 하는지를 살폈습니다. 현대 의학계 역시 이러한 환완주의적 패러다임을 통해 굴러가기에, 이들이 아헹가의 작업에 주목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헹가는 위대한 혁신가였으며, 그의 작업이 값진 연구 결과와 관점을 가져다 주었음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아쉬탕가 요가의 시스템적 관점을 저버림으로써 몇 가지 중요한 내용과 관점 역시 상실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아헹가 수련생이자 지도자로서 요가 여정을 시작해 아쉬탕가로 방향을 전환했는데요, 직접 경험한 바로는, 환원적인 아헹가 테크닉과 비교해 보았을 때 아쉬탕가 수련의 시스템적 관점과 경험이 더욱 심오하고. 풍부하고, 포괄적이었습니다. 초기 4년 동안 아헹가 수련을 했던 것도 의미는 있었지만, 이후 14년동안 계속해서 매일 아쉬탕가를 수련하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겠죠. 몇몇 분들은 제가 “아헹가에 대한 배경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찾아왔고, 정렬(alignment)에 집중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합니다만, 저는 이들에게 이 두 가지 체계는 사실 병행이 불가능하며, 함께 수련할 수 없다고 대답을 드립니다. 저는 아쉬탕가를 수련하고 가르칠 때, 아헹가 수련에서 온 정렬 원칙이나, 보조 도구들, 테크닉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물론 아쉬탕가 체계에서도 정렬이 존재하지만, 그 관점은 매우 다릅니다. 아쉬탕가 수련에서 정렬은 그 시스템적 관점과 경험 속에 녹아 들어가 있습니다.

다시 통증과 병리학이라는 주제로 돌아오겠습니다. 아사나 수련생들이 통증에 환원주의적으로 접근하는 사례로서, 특정한 근육, 관절, 인대 등에 존재하는 병리적 증상을 발견하고자 정밀 검사를 받거나, 여타 진단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들 수 있겠습니다. 어떤 국지적인 병리 현상을 집어낸다고 했을 때(혹은 이론화시킬 때), 아사나 수련에서 경험하는 통증 역시 바로 그 병리 증상이 직접적으로 유발한 것으로 이해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 처방 역시, -수술을 통해서나, 보다 가볍게는 심부 조직 이완이나 집중적 지압을 통해- 그 병리 증상을 없애는 것이 되겠죠. 신체 부위에 어떤 진단이 내려지는가에 따라 개인의 아사나 수련에도 상당한 변화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아사나에 대한 환원주의적 접근의 또 다른 사례로, “무릎이 아픈 건 둔부가 타이트해서 그래요~”라고 말하면서, 아사나 수련과 함께 할 수 있는 “힙 오프닝” 동작을 알려주는 선생님을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힙을 더 열어주는 것”이나 “어깨를 더 열어주는 것”이 자신의 수련에서 마주하게 되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하는 학생들을 많이 봐왔습니다. 하나의 아사나와 끙끙 씨름을 하고 있는 학생들은 종종 자신의 “신체의 어떤 부분”이 뻣뻣하거나 막혀있는 건지, 혹은 더 열어줘야 하는지, 그래서 그 아사나가 안 되는 것인지를 묻기도 합니다.

이보다 동양에서 영향을 받은 환원주의로는, 모든 신체적 통증, 긴장, 또는 “막힘(blockage)”이 심리적인 원인에서 기원했다고 보는 입장이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의식을 모든 신체적 경험의 근본 원인으로 보며, 몸에 생기는 통증 역시 정신적 영역의 장애 혹은 막힘으로만 이해됩니다. 이러한 경우 안쓰럽게도 학생은 자신의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사실상 다룰 길이 없는 정신적 문제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죠.

위에서 나열한 모든 사례들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한 사람의 몸-마음 상태의 전체론적인 경험을 단일한 근본 원인으로 환원시키는 것, 그리하여 개인의 몸-마음의 전체론적인 상태는 하나의 근본 원인을 변화시키거나 바꿈으로써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환원주의의 핵심이죠.

인간은 극도로 복잡한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체에는 11개의 기관계(골격계, 운동계, 신경계, 감각계, 내분비계, 순환계, 림프계, 소화계, 호흡계, 배설계, 생식계)가 있으며, 인지, 감정, 에너지와 같이 다양한 층위의 “비-물질적” 경험까지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체계들과 층위들은 모두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역동적 관계와 피드백 회로로 구성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네트워크 상에서 조정이 이뤄집니다.

이러한 인간의 몸-마음 체계가 특정한 아사나나 빈야사의 전환적 자세를 취할 때, 인간의 물리적, 비-물리적인 체계와, 이러한 체계들 사이에 형성된 연결 및 관계 네트워크 역시 영향을 받게 됩니다. 전반적으로는 인간의 상태 총체에 전환이 생기게 됩니다. 존재 전반에 생기게 되는 이러한 전환은 “창발성(emergent property)”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몸-마음의 구성 요소가 가지는 속성이나, 아사나가 단일한 구성 요소들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서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역동적이고 복합적 체계의 창발성(創發性)은, 말 그대로 모든 구성 요소들이 가지는 관계의 복합적인 역학 속에서 “나타나게(emerge, 發)” 됩니다. 여기서 꼭 이해해야 할 것은, 전체의 창발적 특징은 부분들 사이에 형성된 관계의 속성과 역학의 결과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특성은 체계를 역동적인 전체로 바라볼 때만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리야 나마스카라 A의 에캄 자세에서부터 우뜨플르띠히까지 이어지는 아쉬탕가 시리즈 또한 하나의 체계로서 이해해야 합니다. 어떤 아쉬탕가 시리즈가 되었던 간에, 시리즈 하나를 통째로 수련할 때는 그만의 특정한 효과, 특징, 결과를 가져오게 되며, 이는 해당 시리즈의 개별 아사나가 가지는 특징을 통해서는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해당 시리즈의 각 아사나 모두를 분석한다고 하더라도 이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특정한 아쉬탕가 시리즈를 수련함으로써 개인이 경험하게 되는 효과는, 시리즈 상의 모든 아사나와 빈야사들 사이에 형성된 관계로부터 나타나는 창발성의 결과이며, 이는 시리즈 하나가 오롯이 전체가 되는 복합적이고 역동적 체계로 인식할 때만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체계에서는 상대적인 안정성이 변화할 수 있습니다. 체계에 존재하는 부분들간의 역동적인 관계가 두드러지게 변화하거나 바뀐다면, –가령 장기적이고 경향적인 자세가 상당히 바뀌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겠죠- 이러한 체계는 불안정하고, 전환의 과정 상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 –통증과 같이- 체계에서 어떤 창발적 특성이 나타난다면, 이는 어느 한 부분의 특징이 아닌 체계 전체의 특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통증이라는 것은, 어떤 체계가 하나의 구조적 상태에서 또 다른 구조적 상태로 바뀔 때 체계의 부분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와 피드백 회로가 재구조화되면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즉 통증이라는 것은 단일한 근본 원인으로 이나, 체계상 하나의 구성 요소에 “기능 장애(dysfunction)”가 생겨서 나나타는 증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장기적으로 아쉬탕가 수련을 하면서 통증이나 거북함은 느끼게 되는 많은 경우, 이러한 관점은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방법이 되어주는 것 같습니다. 아쉬탕가 시리즈의 체계는 인간의 총체적 체계 상 부분들 간의 텐세그리티 역학 관계를 바꾸거나 변화시키는 데 영향을 줍니다. 통증은 이렇게 복합적이고도 역동적인 관계들이 바뀔 때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통증은 체계 상 어느 한 부분의 속성이 아니며, 따라서 단선적인 인과관계의 시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야기가 이 글 첫 부분에 나왔던 알프 나츰슨의 인용문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네요. 해부학과 병리학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와 상관없이, 저는 어느 누구도 통증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겠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이런 류의 상황에서는 특히 그렇고요. 통증이라는 것은 신체 어느 한 부분에 존재하는 근본적 병리 증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통증은 전 인체 구성하는 부분들 간의 변화하는 관계의 역학을 반영하고 있을 뿐입니다. 정확히 어떤 형태로 이러한 패턴이 짜여 있고 어떻게 변화해가는지는 너무나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으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고로 통증에 대한 해결책은 반드시 시스템적 관점을 필요로 합니다. “변형적 통증(transformational pain)”이 발생하는 경우 경우, 가급적이면 체계가 가지는 역학에 최소한의 변형만 주어 아쉬탕가 시리즈 체계를 계속해서 수련해나가야 합니다. 이를 통해 수련이 인체에 주는 영향은 일관성을 가지며, 수련을 통한 지능적 재조직 과정 역시 안정적으로 유지됩니다. 인간의 몸-마음 체계는 매일의 짧은 아쉬탕가 시리즈가 주는 양분을 빨아들여, 추구하고자 하는 안정적이고 장기적 자세를 체현하게 됩니다. 지능적인 움직임이 지속될 때 통증은 자연스레 해결될 것입니다. 반면에 제한과 환원주의 지향적 개입은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고요.

 

매일 요가를 18년간 수련하다 보니(그 중 14년은 아쉬탕가였죠), 통증을 겪었던 때도 많았습니다. 짧은 때는 몇 일 정도에 그쳤지만 길 때는 일년간 지속되기도 했죠. 어떨 땐 통증이 너무 심해서 움직이는 것 조차 제약이 많을 때도 있었고요. 이 글에서 누차 말씀 드린 것처럼 대다수 경우 이러한 통증은 중력과 내 몸의 관계를 보다 깊게 재구조화/바로잡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부차적인 현상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통증은 신체의 어떤 부분에서 나타나기는 했지만, 특정한 구조(가령 특정한 근육, 인대, 뼈, 관절 등)에 머무르지는 않았습니다. 통증이 생길 때 마다 제가 접근하는 방식은 항상 같았습니다. 평소 수련의 보다 기본적 버전으로 한발 물러나는 거죠. 대부분 이는 더 아래 단계의 시리즈를 수련하거나 시리즈의 일부분을 수련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또한 통증이나 거북함이 동반되더라도 에너지가 지속될 수 있다고 느끼는 경우 가급적이면 모든 시리즈를 수련했습니다. 대다수의 경우 어떤 시리즈를 “테라피적으로” 활용할지, 그리고 그 시리즈를 얼마만큼이나 수련할지에 대한 결정은 직관적으로 내렸습니다. 저는 시스템적인 사고를 할 때 보다 직관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다고 보는데, 이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 대다수 현대 사회의 분석적이고 환원주의적 접근과는 상이한 인지적 이해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수련하려고 하는 시리즈의 동작과 빈야사 중 한 두 개 이상을 수정해야 할 경우, 그 지점에서 수련을 멈추고 피니싱 시퀀스로 넘어갔습니다. 이러한 방법을 사용했을 때 날마다 그리고 매주, 점진적으로 상태가 개선되는 걸 매번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개선이라 함은, 움직임이 쉬워지고, 통증이 줄어들며, (또 마찬가지로 중요한) 자신감과 정신적/에너지적 안정성 및 활력이 증진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좀 더 단순하게 이야기하자면, 개선은 몸과 마음에서 안정성을 찾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태가 점차 좋아지면 자세와 시리즈를 더해나갔습니다. 다시 평소에 하던 수련으로 돌아올 때까지 말이죠. 어느 자세에서 통증을 유발하지 않는 범위가 고작 1인치 차이에 그칠 때도 있었지만 했지만, 집중해본다면 언제나 개선의 징후를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것도 대게는 매일 말이죠. 보통 통증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몸의 다른 장소들을 돌아다니며, 퍼지기도 합니다. 이보다는 좀 더 극적인 경우도 있죠. 그날의 수련에서 특정한 자세나 움직임을 하고 난 후, 매우 심각한 통증이 몸에서 완전히 사라진 적도 있습니다. “회복”이 점진적으로 이뤄지건, 한 순간에 이뤄지건, 그 테크닉은 동일했습니다. 내가 그 순간에 가능한 범위가 어떻든 간에, 조심스럽고 의식적이며 체현된 움직임은 궁극적인 통증의 해결을 유도하고 이러한 방향으로 이끌었습니다.

재미있는 경험을 하나 말씀 드릴게요. 2004년 처음 아쉬탕가를 시작하고 몇 달 남짓 수련을 하고 있을 때였어요. 에너지와 열정이 넘쳤던 시기였는데, 당시 절 지도하던 선생님은 예전 방식대로, 학생이 아직 한 아사나를 완벽하게 소화하지 못하더라도 거기서 끊지 않고 진도를 계속 나갔어요 전 이전에 아헹가 수련을 했었기 때문에 상당한 자세들을 할 수 있었고, 아쉬탕가 수련을 시작한지 몇 달 만에 하루 세 시간 반 동안 프라이머리와 인터미디엇 시리즈 전체를 수련하고 있었어요. 물론 어마어마한 통증에 시달리며 극적인 구조 변화를 겪고 있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죠. 저는 다양한 통증이 생겼다가 사라지고, 내 몸에서 구조적인 전환이 이뤄지는 과정을 재미있고 흥미롭게 지켜봤어요.

이로부터 4-5년전 제가 아헹가 요가 수련을 시작했을 때, 고아 북부의 한 해변에서 선 자세에서 후굴로 넘어가는 드랍백을 배웠어요. 사실 이 동작을 할 준비가 안 된 상태였는데, 같은 반의 유연한 여학생이 하는 걸 보니까 나도 시도해보고 싶더라고요. 선생님도 저더러 해보라고 격려하기도 했고요. 의욕을 충만해져서 등을 아치 모양으로 만들고 성공적으로 후굴 자세로 착지했습니다. 신나기도 하고, 짜릿하기도 했어요. 이틀이 지나서 우리 수업에서 다시 후굴 “작업”에 들어갔는데, 또 드랍백을 하고 싶어졌어요. 또 어찌저찌 성공은 했는데 이번엔 선생님께서 다가오시더니 내 등을 당겨 올려 선 자세로 만들어주시더라고요. 이렇게 우리는 계속해서 서는 자세를 연습했고, 요추 뼈 두 개 사이에서 통증이 느껴졌어요. 온종일 통증은 자꾸 커져만 갔고 이후 그 해 고아에서 보낸 4개월 내내 통증이 따라다녔죠. 그러다 보니 부정적인 감정도 잔뜩 생겼고요. 결국에는 저절로 해결이 되었지만.

2004년 아쉬탕가를 시작하고 처음 몇 달간 카포타사나는 제 최대 강적이었어요. 발 뒤꿈치를 잡는 게 너무 어려웠고, 매일 카포타사나로 들어가기 위해 등에 아치를 만들 때면 선생님이 제 앞에 나타나서는 공중에서 손으로 발 뒤꿈치를 잡아주셨어요. 항상 끔찍하긴 했지만 한번 잡고 나면 기분이 좋아졌죠. 매일 그랬어요. 준비하는 자세에서 선생님은 분명 수련실 반대쪽에 있었는데, 내가 아치를 만들기 시작하면 짜잔 하고 내 앞에 나타나서 손을 뒤꿈치에다 가져다 놨죠. 당시 이 수련이 나에게 준 영향은 매우 깊었고, 매일의 카포타사나가 주는 특별한 경험은 일어나고 있던 모든 일들의 심장부를 관통하고 있었어요. 어떨 땐 오후에 명상을 하려고 앉아서 눈을 감고 한 시간을 보내면서 카포타사나를 할 때의 느낌에 대한 명상을 하기도 했어요. 몇 번이고 나는 마음에서, 내 신경에서, 내 몸에서 떠오르는 느낌을 다시 되새겨봤죠. 한 손이 뒤꿈치를 잡고, 반대 손이 뒤꿈치를 잡고, 팔꿈치를 내리고, 그러다가…쿵…이 때의 희열이란. 무한 반복 재생을 한 비디오 테이프처럼, 몇 번이고 반복했어요. 이렇게 내 존재의 모든 층위와, 내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변화 과정에 경험의 깊이를 더해나갔어요.

이러다 보니 몇 년 전 해변에서 아헹가 드랍백을 하다가 다쳤을 때와 같은 요통이 척추 사이에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매일 매일 통증은 커져만 갔죠. 고아에서 허리를 다쳤을 때 가졌던 감정이 다시 떠올랐고, 매일 카포타사나를 준비할 때마다 갈수록 무섭고 초조해졌어요. 그렇지만 카포타사나를 만들고 나면 따라오는 에너지적인 희열 때문에 모든 게 괜찮았죠. 하루는 아침에 일어났는데 허리가 너무 쑤셨어요. 이 때의 느낌은 고아에서 부상을 입고 난 이후와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에 잔뜩 풀이 죽었죠. “뭐야. 다시 원점이잖아. 앞으로 최소 네 달은 요통을 달고 살겠네…”라고 생각했어요. 꾸역꾸역 수련과 수업에 계속 나갔지만, 몇 일간은 절대 카포타사나를 하지 않을 거라고 굳게 마음을 먹었죠. “선생님이 다기오면, 할 수 없다고 말할 거…”

수련이 카포타사나에 가까워지면서 선생님을 계속 쳐다봤죠. 물론 때가 되자 선생님은 내 앞에 나타났고요. “선생님, 오늘은 안 되겠어요.” 전 딱 잘라 말했죠. 그러니 “그냥 해. 호흡하고.”라고 대답하시더라고요. “아뇨 선생님, 허리가 진짜 아프다고요…”라고 말씀 드리니, “하라고!”라고 버럭 소리치시더군요. 나는 한숨을 쉬면서 아치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척추 사이에서 익숙한 통증이 느껴졌고, 선생님은 다시 한 손을 잡아 뒤꿈치로 가져갔어요. 나는 까무러치면서 가까스로 “안돼요!”라고 소리쳤어요. 나는 선생님을 뿌리치면서 올라오려고 했죠. 선생님은 나를 내려다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닥치고 호흡이나 해, 울지 말고”라고 했어요. 선생님은 계속 손을 잡아당겼고, 그럴수록 나는 어쩔 줄을 몰라 했죠. 나는 계속해서 허우적거리다가, 자세와 선생님 손아귀에서 벗어나 바닥에 철푸덕 무너졌어요. 아주 극적인 장면이라 수련실에 있던 모슨 사람들이 자기 수련을 멈추고 뭔 일이 일어났는지 쳐다봤어요. 선생님은 내 위에 서서 실망한 듯 고개를 휘저었어요. 내 가까이에서 수련을 하고 있던 다른 선생님께선, “다리를 더 조여야 해, 그래야 허리가 안 아프지”라고 하셨어요. 우리 선생님은 휙 돌아보면서 모두가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허, 얜 다리나 허리가 문제 있는 게 아냐. 그냥 오늘 정신이 약해빠졌을 이라고. 그게 다야.”라고 소리쳤어요.

선생님의 방법은 약빨이 좋았죠. 몸과 마음이 바닥에 내려앉고 힘이 빠져나간 상태였는데 순간적으로 내 안에서 분노와 에너지가 솟아오르는 걸 느꼈어요. 감히 내게 정신이 약해빠졌다고 하다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겠어. 나는 빠르게 올라와 중얼거렸죠. “알겠다고요. 하면 되잖아요!” 선생님께서는 방긋 미소를 지으셨고 나를 보기 위해 한 발 뒤로 물러났어요. 나는 준비 자세를 취하고 망설임 없이 등을 말아 카포타사나로 들어갔어요. 두려움과 공포 대신, 아주 강한 자신감과 긍지가 느껴졌어요. 허리도 아프지 않았고, 한 손을 뒤로 뻗어 난생 처음으로 아무런 도움도 없이 뒤꿈치를 잡았어요. 선생님은 다가서더니 두 번째 손만 살짝 잡아주셨어요. 나는 팔꿈치를 내렸죠. 선생님께선 나를 내려다보며, “봤지? 징징거리면서 호들갑 칠 이유가 없잖아?”라고 하시더라고요. 척추 사이에서 느껴지던 통증은 완전히 사라졌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어요.

위의 사례는 다분히 극적이고, 저 역시 보통은 이러한 류의 방법을 추천하거나 활용하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얼마나 빠르고 갑자기 인체의 텐세그리티가 변화하고 바뀔 수 있는지, 얼마나 다양한 요소들이 특정한 몸-마음 상태의 내적인 관계 패턴에 영향을 주는지를 살펴볼 수 있죠. 위의 경우, 정신적, 에너지적인 관점의 전환이 내 몸에 새롭고도 더욱 건강한 물리적 구조 패턴을 만드는 데 많은 기여를 했죠.

움직임은 치유를 해줍니다. 두려움과 제약은 그렇지 못하고요. 나는 요가 밖에서도 항상 이런 경험을 합니다. 요가 수련을 시작하기도 전 이십 대 때 몇 일간 배낭 여행을 하다가 왼쪽 사타구니를 다친 적이 있어요. 저는 친구와 함께 캐나다 서부 해안 중에서도 특히 고 난이도 장거리 구간을 도보로 이동하고 있었어요. 우리는 다음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 계획했던 거리를 이동하는 데 이미 몇 시간이나 더 지체되고 있었어요. 계속 나아가기 위해서 몸에 힘을 실어주는 유일한 방법이라곤, 내 다리가 위아래로 힘차게 펌프질을 하는 피스톤이라고 생각하는 것 밖엔 없었죠. 신기하게도 이러한 이미지 덕에 오랫동안 쌓인 근육의 피로를 잊을 수 있었어요. 새벽쯤 되어서야 마침내 야영을 하려고 했던 해변에 도착할 수 있었고, 무거운 짐을 던져버리고 쓰러지듯 드러누웠죠. 우리는 오랫동안 가만히 누워 몸을 관통하는 엔돌핀의 홍수를 즐겼어요. 시간이 지나 다시 일어나자 왼쪽 사타구니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어요. 저녁이 되면서 통증은 더 심해졌고 다음날 아침에도 계속되었죠. 두 발만이 다시 문명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기에, 짐을 싸고 다음날 다시 걸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부상은 한동안 낫질 않았고 걱정은 커지기 시작했어요. 난생 처음 캐나다 밖을 여행할 계획을 하고 있던 때였고, 몇 주 후 인도네시아로 가는 비행기를 예약해 두었기 때문이죠. 젊은 시절엔 그렇게 지독한 통증을 경험한 적이 없었어요. 결국엔 의사 진찰을 받으러 갔죠. 의사 선생님은 정밀검사나 테스트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고 짧게 진찰만 한 뒤 6주에서 8주정도 있으면 나아질 거라고 했어요. 나는 팔팔한 상태에서 여행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솔직히 걱정된다고 말했고, “좀 자제하면서 더 쉬어야” 하는 게 아닌지 물었어요. 선생님께선 크게 웃으며, “자제 같은 거 안 해도 되어요. 이안, 아무런 문제 없을 거에요.”라고 대답했어요. 이 말은 아주 강력한 치유 효과를 가졌고, 나는 자신감으로 충만해졌어요.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와 계속 해서 여행을 준비했어요. 계속 통증은 느껴졌지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고, 그것 때문에 자중해야겠다고도 생각하지 않았죠. 몇 주가 지나 나는 발리에 도착했고 사타구니에 있던 통증은 씻은 듯이 사라졌어요.

이후 몇 달간 나는 인도네시아의 섬들을 다녔고 마침내 인도로 날아가 대륙을 여행했어요. 평소대로 몸을 많이 썼지만 사타구니 부상은 그저 과거의 일인 것만 같았죠. 떠올릴 일도 없었고요. 그러다 함피에 도착했어요. 하루는 늦은 오후 커다란 바위에 누워 태양이 데웠다 발산하는 열기를 온몸으로 즐기고 있었죠. 해는 이미 저물어 지평선을 넘어 가버렸고요. 나는 완전히 긴장을 풀고 고요와 평화 속에 잠겨 있었어요. 순간, 사타구니에 “따끔” 거리는 게 느껴졌고, 그렇게, 다시 통증이 돌아왔어요. 까무러치는 줄 알았죠. 그날은 종일 별로 움직이지 않았고, 통증이 돌아온 그 순간에는 바위에 누워 완전히 긴장이 풀린 상태로 뜨뜻한 마사지를 받고 있었어요. 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게스트하우스에 돌아왔고, 이후로도 몇 일간 통증이 지속되어 걱정은 더욱 커져만 갔어요.

나는 순간 신체 활동을 자제하자는 원칙을 세웠어요. 지금으로선 내 몸을 쉬도록 하는 게 가장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다음 목적지를 해변으로 잡아 완전히 쉬려고 했어요. 원래는 얼마 뒤 히말라야에 가서 등산을 잔뜩 하려고 했죠. 그 다음엔 캐나다로 가서 몇 달간 나무 심는 일을 하면서 이듬해 다시 여행할 자금을 모으려고 했고요. 여행 이전 3-4년동안 나무를 심는 일은 내 주 소득원이었어요. 캐나다에서 나무를 심는 일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굉장히 고되고도 힘든 직업이에요. 한 번 나가면 몇 달은 캐나다 북부 야생 속에서 텐트를 치고 지내야 하고요, 매일 10시간에서 12시간씩 나무가 베인 곳에 묘목을 심으며 시간을 보내야 해요. 숙달된 사람이라면 매일 나무를 3000그루까지도 심을 수 있고 벌이도 꽤나 짭짤해요. 물론 이게 가능 하려면 몸이 건강하고 튼튼해야겠죠. 다리 부상으로 내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길 수가 있는 상황이었어요.

나는 해변에 퍼져 지내며 쉴 계획을 세웠고, 한 달 동안은 뒹굴 거리거나, 가끔 수영하는 것만 빼놓고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냈어요. 이 시기 동안 내 다리 상태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어요. 걱정은 커져만 갔고, 머리 속으로는 무일푼인 상태로 집으로 돌아가, 앞으로 원하는 삶을 계속 살기 위해 내가 선택한 일 조차 할 수 없는 모습을 떠올렸죠. 결코 달가운 그림이 아니었어요. 내 몸 상태에 대한 불안은 커져만 갔습니다.

몸 상태가 아쉽긴 했지만, 히말라야까지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더운 계절이 시작되고 있었고, 보다 안락한 기후대로 이동하고 싶었죠. 가는 도중에 델리에 들러 의사를 만났습니다. 선생님은 완전히 쉬면서 진통제를 먹으라고 아주 모범적인 진단을 내렸죠. 너무 딱 잘라 말씀을 하셔서 한층 더 풀이 죽었어요. 나는 선생님의 조언을 무시하고 다람살라(Dharamsala)까지 갔고, 다람콧(Dharamkot) 마을에 다다랐어요. 이곳에서 저는 이후 2년간 좋은 시간을 보내게 되죠.

다람콧은 가파른 산 한 언저리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인데, 당시만 해도 도보로만 접근할 수 있었어요. 어떤 이유로 어딜 가건, 가파른 경사를 오르내려야만 했죠. 활동량이 엄청 늘었는데도 다리 상태가 나빠지지 않는 게 기쁘고도 신기했어요. 산의 환경은 쾌적했고 매력적이었어요. 나는 생기와 에너지로 충만해졌고, 보다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탐험하고 싶었어요. 이럴 군번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면서도 주변 산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어요.

얼마 후, 나는 다람살라의 예쉬 돈덴(Dharamkot)이란 사람이 티베트 전통 의술로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요.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하루는 아침 일찍 그의 진료소를 찾아 갔고, 붐비는 대기실에서 번호표를 뽑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 차례가 오자 의사 선생님을 만나러 들어갔고, 통역을 통해 사타구니 부상에 대해서 말해드렸어요. 선생님은 맥을 짚더니 손가락으로 사타구니를 만져봤어요. “선생님께서 응어리를 찾았습니다.”라고 통역은 말했죠. “응어리라뇨?”하고 저는 물었죠. “네, 에너지의 응어리요. 뭔가가 막혀있네요..”라고 통역은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은 환으로 만든 티베트 약초들을 처방해주며 어떻게 복용하는지 알려주었고, 2주 뒤에 다시 오라고 했어요. 특히 “약을 복용하는 동안 열심히 움직여야 합니다!”라는 걸 강조했어요. “열심히 움직이라고요?”, “그니까 걷는 것 같은 거 말이죠?” 하고 나는 물었죠.. “네! 꼭 많이 걸으셔야 해요. 그래야지 부상 부위로 에너지가 흘러 들어가 약빨이 잘 들어요.”라고 대답하더군요. 전 놀라서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어요. “등산 하러 가도 되나요?”라고 물었죠. “오 물론이죠. 등산은 매우 좋아요.”라고 말했어요.

캐나다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자중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처럼, 나는 예시 돈덴의 진료소를 기쁜 마음으로 떠났습니다. 힘이 넘치고 자신감이 생겼죠. 가방에 티베트 약을 챙겨두고 바로 등산 계획을 짜기 시작했어요. 그 후 6주동안은 다람살라에서 하이킹과 트레킹을 하고, 난생 처음으로 요가 수련도 했어요. 나는 2주마다 예시 돈덴에게 진찰을 받았고 갈 때마다 새로운 약초로 만든 환을 받아왔어요. 선생님은 내 상태가 호전되는 걸 매우 기뻐하셨고 조금 있으면 완전히 나을 거라고 하셨죠. 캐나다로 다시 돌아갈 때쯤엔 아직 한 달은 더 먹을 수 있는 약이 남아있었고, 통증은 완전히 사라졌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나무 심는 일을 시작했어요. 통증은 잠시 다시 돌아오는 듯 하더니, 왼쪽 사타구니에서 오른쪽 엉덩이로 이동해갔고, 이후로는 사라져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리고 나는 계획대로 여행을 했습니다.

번역: 조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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