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 Jonathan Safran Foer

아랫글은 Jonathan Safran Foer가 쓴 Eating Animals의 한국어 번역본 232-254쪽에서 발췌한 것이다.

 

4 우리의 새로운 사디즘

환경 문제는 인간을 돌보는 임무를 맡은 의사들과 정부 기관들이 추적할 수 있지만, 항상 흔적이 남지는 않는 공장식 축산업의 동물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헌신적인 비영리 조직들이 비밀리에 진행한 조사들은 그날그날 엉성하게 운영되는 공장식 축산업의 실태와 산업화된 도축장을 대중이 들여다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창구 역할을 해 준다. 노스캐롤라이나의 한 산업화된 돼지 번식 시설에서 비밀 조사원이 촬영한 비디오테이프에는 몇몇 노동자들이 매일 동물을 구타하고, 새끼 밴 암퇘지들을 렌치로 때리고, 쇠막대로 어미 돼지의 직장과 질을 깊숙이 쑤시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행동으로 고기의 맛을 더 좋게 하거나 돼지들한테 도축될 준비를 시키는 것도 아니다. 그저 변태 짓일 뿐이다. 그 농장에서 촬영한 다른 비디오테이프에서는 노동자들이 아직도 의식이 있는 돼지들의 다리를 톱으로 잘라 내고 껍질을 벗긴다. 미국 최대의 돼지고기 생산업체 중 한 곳에서 운영하는 또 다른 시설에서는 몇몇 직원들이 돼지를 집어 던지고, 때리고, 발로 차는 모습이 찍혔다. 돼지들을 콘크리트 바닥에 내던지고 쇠막대와 망치로 때렸다. 또 1년에 걸친 조사를 통해 어떤 농장에서는 1만여 마리 돼지들을 조직적으로 학대한 사실이 발견되었다. 조사는 노동자들이 동물들의 몸에 담배를 비벼 끄고, 동물들을 갈퀴와 삽으로 구타하고, 목을 조르고, 분뇨 구덩이에 집어 던져 익사시킨 증거를 잡았다. 또한 노동자들은 돼지들의 귀와 입, 질과 항문에 전기 막대를 꽂았다. 조사는 관리자들이 이러한 학대 행위를 묵인하고 있으나, 관계당국들은 기소를 거부했다고 결론지었다. 기소하지 않는 것이 예외가 아니라 일반화된 관행이다. 요즘 시대가 유독 법 집행이 ‘느슨한’ 것은 아니다. 회사들이 농장 동물을 학대한 죄로 붙잡힌다 해도 무거운 형벌을 예상할 수 있는 시대가 아예 한 번도 없었을 따름이다.
우리가 어떤 농장 동물 산업에 관심을 돌리건, 비슷한 문제들이 일어난다. 타이슨 식품은 KFC의 주요 공급 업체이다. 한 대규모 타이슨 시설을 조사한 결과, 몇몇 노동자들이 (감독관으로부터 확실히 허가를 받고서) 멀쩡하게 의식이 있는 새들의 목을 정기적으로 뽑고, (새들을 운반하는 컨베이어 벨트 위를 포함하여) 산 채로 매달아 놓는 곳에 오줌을 누고, 새들의 목보다는 몸통을 자르는 싸구려 자동 도축 장비를 제대로 수리하지 않고 놔두었다. KFC의 ‘올해의 우수 공급 업체’인 필그림스 프라이드에서는 완전히 의식이 있는 닭들을 발로 차고, 짓밟고, 벽에 집어 던지고, 눈에 씹는담배를 뱉고, 문자 그대로 닭들이 똥을 질질 싸게 만들고, 부리를 잡아 뜯었다. 그리고 타이슨과 필그림스 프라이드는 KFC에 닭을 공급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내가 글을 쓰고 있던 시점에 그들은 한 해 50억 마리에 가까운 새들을 죽이면서 미국에서 가장 큰 닭고기 가공업체로 군림했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좌절감을 동물들에게 분출하는 데서 비롯되는 극단적인(하지만 꼭 드문 것은 아니다.) 학대에 대해 알기 위해 은밀히 행한 조사에 굳이 의존하지 않아도, 우리는 공장식 축산 동물들이 비참한 삶을 산다는 것을 안다.
새끼를 밴 암퇘지의 삶을 생각해 보자. 암퇘지의 놀라운 번식력이 지옥의 근원이 된다. 소는 한 번에 송아지 한 마리만을 낳는 반면, 현대의 공장식 축산 암퇘지는 새끼 돼지를 평균적으로 거의 아홉 마리씩 낳고, 젖먹이고, 기른다. 해마다 이 숫자를 늘린 결과 아홉 마리까지 온 것이다. 암퇘지는 언제나 똑같이 최대한 많이 새끼를 배는데, 임신 기간이 암퇘지의 일생에서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예정일이 다가오면, 출산 시간을 농부에게 더 편리하게 맞추기 위해 출산을 유도하는 약물이 쓰이기도 한다. 새끼 돼지의 젖을 뗀 다음에는 호르몬을 주사하여 암퇘지를 빨리 ‘주기’로 되돌림으로써 3주 만에 다시 인공적으로 수정할 준비를 마친다.
암퇘지는 다섯 번 중 네 번은 너무 작아서 몸을 돌릴 수조차 없는 ‘임신용 우리’ 속에 갇혀서 16주의 임신 기간을 보낸다. 운동 부족 탓에 골밀도가 감소한다. 잠자리 짚도 받지 못하고, 우리에 쓸려서 고름이 찬 탓에 25센트 동전 크기로 시커멓게 변한 짓무른 상처들이 생기기도 한다. (네브래스카에서 이루어진 한 비밀 조사에서는 얼굴, 머리, 어깨, 등, 다리에 짓무른 상처들이 가득한, 새끼 밴 돼지들이 촬영되었다. 농장의 한 노동자가 이렇게 말했다. “다 상처가 있어요…… 상처 하나 없는 돼지는 여기에 없어요.”)
암퇘지에게 더 심각하지만 흔하게 일어나는 문제는 지루한 고립으로 고통 받고, 곧 태어날 새끼 돼지를 위해 준비하고 싶은 강한 욕구를 분출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연에서 암퇘지는 새끼를 낳기 전에 재료를 구하러 돌아다니는 데 많은 시간을 쏟고 마침내 잔디와 잎, 짚으로 보금자리를 꾸민다. 우리에 갇힌 암퇘지들은 몸무게가 지나치게 불어나는 것을 막고 나아가 사료 비용을 줄이기 위해 사료 공급을 제한받기 때문에 굶주리는 경우가 많다. 또한 돼지들은 잠을 자고 변을 보는 데 분리된 공간을 쓰려는 타고난 성향이 있지만, 갇혀 있으므로 이는 완전히 무시된다. 새끼를 밴 돼지들은 산업화된 시스템 안에 있는 돼지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자기들의 배설물 위에 눕거나 그 속을 헤집고 걸어 다녀야 한다. 업계는 동물들을 더 잘 통제하고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주장으로 이러한 감금을 변명한다. 그러나 어떤 동물이든 움직일 수 없게 해 놓으면 불구이거나 병든 동물들을 가려내기가 거의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동물의 복지에 이로운 관행을 실행하기가 어려워진다.
이 잔인성은 부인하기가 어렵다. 공장식 축산 옹호자들이 이런 현실을 공개 토론으로 끌어낸 이상, 분노를 억누르기도 어렵다. 최근 플로리다, 애리조나, 캘리포니아 세 개 주가 국민 발의를 통해 임신용 우리를 차차 단계적으로 폐지할 것을 법제화했다. 콜로라도에서는 동물 애호 협회의 캠페인에 위협을 느낀 업계가 먼저 나서서 우리를 금지하는 법안을 기초 설립하고 지지하는 데 동의했다. 이것은 놀라우리만치 희망적인 신호이다. 이러한 관행이 만연한 주들이 아직도 많이 있지만, 임신용 우리와 벌이는 싸움은 승리할 것 같다. 이것은 의미 있는 승리다.
임신용 우리에 들어가는 대신 작은 무리를 지어 우리에서 사는 암퇘지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암퇘지들은 폴 윌리스의 돼지들처럼 들판을 달리거나 햇살을 즐기지는 못하지만, 잠을 자거나 몸을 쭉 펼 공간은 확보했다. 온몸이 다 짓무르지도 않는다. 미친 듯이 우리 창살을 물어뜯지도 않는다. 이러한 변화가 공장식 시스템의 죄를 면해 주거나 이 시스템을 거꾸로 돌리지는 못하겠지만, 암퇘지들의 삶을 크게 개선시키고 있다.
임신 기간에 임신용 우리에 갇혀 있었건 조그만 우리 속에 있었건, 새끼를 낳을 때 암퇘지는 업계에서 분만용 틀이라고 부르는, 임신용 우리만큼 꼭 끼는 나무틀에 거의 항상 갇혀 있다. 한 노동자는 “암퇘지들이 가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나무틀 안에 들여보내려면 [임신한 돼지들을] 흠씬 두들겨 패 주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다른 농장의 또 다른 직원은 암퇘지들을 피가 나도록 때리기 위해 일상적으로 막대기를 쓴다고 묘사했다. “어떤 암퇘지 녀석은 코가 얼마나 심하게 짓뭉개졌는지, 결국 굶어 죽고 말았답니다.”
공장식 돼지 축산업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암퇘지들이 가끔씩 우발적으로 제 새끼들을 짓밟을 수도 있기 때문에 분만용 나무틀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산불의 위험을 줄이려면 미리 숲의 나무를 제거해야 한다는 식으로 이런 주장의 논리는 엇나가 있다. 분만용 나무틀은 임신용 우리와 마찬가지로 어미를 몸도 돌릴 수 없을 만큼 좁은 공간에 가두어 놓는다. 가끔은 바닥에 묶어 둘 때도 있다. 이런 관행이 어미 돼지가 제 새끼를 짓밟지 못하게 막아 주기는 한다. 이런 관행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윌리스네 농장 같은 곳에서는 그런 문제가 아예 처음부터 일어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놀랄 일도 아니지만, 농부들이 돼지를 사육할 때 어미 돼지가 어미 구실을 할 수 있게 해 준다면, 어미 돼지의 후각이 제 몸 아래 있는 액화된 제 배설물의 악취로 제 구실을 못하게 되지 않는다면, 금속 우리의 철컹거리는 소리에 어미 돼지의 청각이 약해지지 않는다면, 새끼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어 다리를 움직여 천천히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어미가 제 어린 것을 짓밟지 않도록 쉽게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은 어린 새끼만이 아니다. EU 과학 수의사회가 실시한 연구는, 나무틀 속에 들어가 있는 돼지들이 뼈가 약해지고, 다리 손상이 일어날 위험이 더 높고, 심장 혈관 문제가 생기고, 소변 때문에 감염이 일어나고, 근육량이 심각하게 감소하여 눕는 능력에 영향이 온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른 연구들은 열등한 유전자와 운동 부족, 빈약한 영양 공급으로 인해 돼지들의 10~40퍼센트는 무릎이 휘고, 다리가 굽고, 안짱다리가 되는 등의 증상을 보여서 신체 구조상 건강치 못한 상태임을 보여 주었다. 업계 정기 간행물인 <미국 돼지 축산 농부>는 보통 번신용 암퇘지의 7퍼센트가 감금과 과도한 번식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일찍 죽는다고 보도했다. 어떤 공장에서는 사망률이 15퍼센트를 넘어가기도 한다. 많은 돼지들이 감금 때문에 미쳐서 우리 창살을 계속 물어뜯고, 물병을 끊임없이 눌러 대거나, 오줌을 마신다. 또 어떤 돼지들은 동물 과학자들이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부르는 슬픔에 빠진 행동을 보여 준다.
그다음으로는 새끼들이 있다. 어미들의 고통을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는 새끼들.
많은 새끼 돼지들이 기형을 안고 태어난다. 흔한 선천적 기형으로는 구개파열, 자웅동체, 뒤집힌 젖꼭지, 무항문증, 다리 탈구, 발작적인 떨림, 탈장 등의 경우가 있다. 서혜 헤르니아는 하도 흔해서 거세할 때 외과적으로 교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태어나서 몇 주 동안, 이러한 결함이 없는 새끼들조차도 줄기차게 몸에 퍼부어지는 상해를 견뎌 내야 한다. 생후 48시간 안에 꼬리와, 다른 새끼들을 옆에서 깨물 때 쓰곤 하는 ‘바늘니’를 고통을 줄여 줄 만한 조치 하나 없이 잘라 낸다. 돼지들이 병적으로 꼬리를 물어뜯는 일이 흔한데다 약한 돼지들이 힘센 돼지들을 피할 수가 없는 공장식 환경에서 어미의 젖꼭지를 놓고 다투다가 서로에게 상처 입히는 일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이다. 일반적으로 새끼 돼지의 환경은 따듯하고(22~27도) 어둡게 유지되므로 돼지들은 감각이 더 둔해져서는, 좌절감에 빠져 서로 깨물거나, 서로의 배꼽, 꼬리, 귀를 물고 빠는 행동을 덜 하는 경향을 보인다.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폴 윌리스의 농장에서 하는 대로 동물들에게 공간을 더 많이 주고, 환경의 질을 높이고, 안정된 사회 집단을 만들게 함으로써 이러한 문제들을 피한다.
또한 공장식 축산 농장의 새끼 돼지들은 빨리 성장하고 어미는 과도하게 번식을 하기 때문에 어미의 젖이 시원찮은 경우가 많아서, 새끼 돼지들은 생후 첫 이틀 안에 철분을 주입받는다. 열흘 안에 수컷들의 고환을 잘라 내는데, 역시 진통제 따위는 없다. 이때는 고기 맛을 바꾸는 것이 목적이다. 요즘 미국 소비자들은 거세한 동물의 고기 맛을 더 선호한다. 또한 식별을 목적으로 돼지의 귀에서 5센트짜리 동전 크기만큼 살점을 도려내기도 한다. 농부들이 새끼 돼지들에게서 젖을 떼기 시작할 때쯤이면 새끼 돼지들의 9~15퍼센트는 죽어 있다.
새끼 돼지들이 단단한 음식을 더 빨리 먹기 시작할수록, 시장에 출시할 몸무게(100~120킬로그램)에 더 빨리 도달한다. 이 경우 ‘단단한 음식’에는 도축장에서 나온 부산물인 말라붙은 혈장도 종종 포함된다. (이것을 먹으면 정말로 새끼 돼지들의 살이 오른다. 또한 이것은 위장관의 점막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힌다.) 새끼 돼지들은 그냥 놔두면 대개 15주 정도에 젖을 떼지만, 공장식 축산업에서는 보통 보름만에 젖을 떼는데, 이 기간이 생후 12일까지로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새끼 돼지들은 이렇게 어린 나이에는 단단한 음식을 제대로 소화시킬 수 없기 때문에, 설사를 예방하기 위해 추가로 약물이 투여된다. 젖을 뗀 돼지들은 ‘생육실’이라고 하는 두꺼운 철망으로 된 우리에 집어넣어진다. 이 우리들은 차곡차곡 쌓아 두었기 때문에, 위층 우리에서 아래층 동물들 위로 배설물과 소변이 떨어져 내린다. 사육자들은 새끼 돼지들을 최종 목적지인 비좁은 축사로 옮길 때까지 되도록 오래 이런 우리 속에 가두어 둔다. 축사는 어떤 업계 잡지에서 말했듯이 “돼지를 좁은 곳에 잔뜩 밀어 넣어 놓아야 돈이 되기” 때문에 일부러 비좁게 만든다. 움직일 공간도 없어서 동물들은 칼로리를 더 적게 소비하고, 덜 먹고도 살은 더 많이 찌게 된다.
어떤 종류의 공장에서든 획일성은 꼭 필요하다. 충분히 빨리 자라지 않는 새끼 돼지들, 즉 발육 부진의 돼지들은 밥만 축내는 것들이기 때문에 농장에서는 있을 자리가 없다. 이런 돼지들은 뒷다리를 잡아서 흔들다가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부터 세게 내리친다. 이 흔한 관행을 ‘패대기치기’라고 한다. “하루에 120마리까지 패대기쳐 봤습니다.” 미주리 농장의 한 노동자가 하는 말이다.

우리는 그 돼지들을 흔들다가 내리친 다음 옆으로 던져 버립니다. 열 마리, 열두 마리, 열네 마리를 패대기친 다음, 그것들은 운반실로 가져가서 사체 운반용 트럭에 쌓아 놓습니다. 운반실에 가 보고 아직 살아 있는 것이 있으면 다시 패대기쳐야지요. 그 방에 들어가 보면 녀석들이 얼굴 옆으로 한쪽 눈알을 대롱대롱 매달고 있거나, 미친 듯이 피를 흘리거나, 턱이 으깨진 채로 내달리고 있곤 한답니다.

“그들은 그것을 ‘안락사’라고 하죠.” 미주리 농장 노동자의 아내가 한 말이다.
동물들의 먹이에 항생제, 호르몬, 기타 약물들을 엄청나게 쏟아붓기 때문에 이런 조건에서도 돼지들은 도축될 때까지 대부분 살아 있다. 이러한 약들은 공장식 돼지 축산업에서 흔하디흔한 호흡기 문제와 싸우기 위해서 가장 필요하다. 감금 장소는 습하고, 면역 체계가 스트레스에 취약한 동물들은 빽빽이 모여 있으며, 쌓여 있는 똥오줌에서는 유독가스가 나오는 환경에서 이러한 문제들은 사실상 피할 수가 없다. 돼지들의 30~70퍼센트는 도축될 때까지 이런저런 호흡기 감염을 앓으며, 호흡기 질병으로 인한 사망률만 따져도 4~7퍼센트에 이른다. 물론 이러한 끊임없는 병이 새로운 인플루엔자의 발달을 촉진한다. 그래서 모든 주의 돼지들 전체가 꽉꽉 들어찬 병든 동물들 사이에서 생겨난 새로운 치명적 바이러스에 100퍼센트 감염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물론 이러한 바이러스는 사람에게도 점차 옮겨가고 있다.)
공장식 축산업이라는 세계에서는 예상이 거꾸로 뒤집힌다. 수의사들은 최선의 건강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최적의 수익성을 위해 일한다. 약물은 병을 고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망가진 면역 체계의 대체물로 쓰인다. 농부들의 목표는 건강한 동물들을 키우는 것이 아니다.

[*2016년에 한국은 351,827,000달러에 달하는 냉동 돼지고기 131,217.7톤을 미국에서 수입했다. (출처: 관세청]

5 수면 밑에 존재하는 우리의 사디즘(중심부의 방백)

내가 돼지 축산업을 배경으로 설명했던 동물 학대와 오염에 관한 이야기는 공장식 축산업 전체를 핵심적으로 대표한다. 공장식 축산업의 닭, 칠면조, 소들이 완전히 똑 같은 식은 아니라 해도, 모두 근본적으로는 비슷하게 고통을 겪고 있다. 물고기들도 그렇다고 밝혀졌다. 우리는 물고기와 육상동물을 같은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바다 동물들을 가두어 놓고 집중적으로 기르는 형태인 ‘양식업’은 본질적으로 공장식 수중 축산업이다.
연어 대부분을 포함하여 우리가 먹는 바다 동물들 중 상당수가 양식되어 우리에게 온다. 원래 양식은 야생 물고기 개체군의 감소에 대한 해결책으로 나왔다. 그러나 일부의 주장처럼 연어 양식은 자연산 연어에 대한 수요를 줄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자연산 연어에 대한 국제적 착취와 수요를 늘리는 역할을 했다. 전 세계적으로 자연산 연어의 포획량은, 1988년에서 1997년까지 연어 양식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과 똑같이 27퍼센트 늘어났다.
양어장과 관련된 복지 문제들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업계 입문서인 <연어 양식 안내서>에서는 ‘양식 환경에서 일어나는 스트레스 핵심 요인’ 여섯 가지를 나열한다. ‘수질’, ‘밀집도’, ‘취급’, ‘소란’, ‘영양’, ‘위계질서’가 그것이다. 이를 쉬운 말로 풀어 보자면, 연어에게 고통을 주는 여섯 가지 근본 원인이 된다. (1) 물이 너무 더러워서 연어가 숨 쉬기가 힘들다. (2) 너무 좁은 곳에 몰아넣어 서로 잡아먹기 시작한다. (3) 너무 거칠게 다루어서 하루만 지나면 스트레스를 받은 것이 뚜렷이 보인다. (4) 농장 일꾼들과 야생 동물들 때문에 소란스럽다. (5) 영양 부족으로 면역 체계가 약해진다. (6) 안정된 사회적 위계질서를 만들어 낼 수가 없어서 서로 잡아먹는 현상이 더 심해지는 결과가 온다. 이는 전형적인 문제들이다. 안내서는 이런 문제들을 “양식업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구성 요소들”이라고 부른다.
연어와 다른 양식 어종들을 괴롭히는 주된 근원은 더러운 물에서 창궐하는 바다물이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 이는 개방성 창상을 만들고, 때로는 물고기의 얼굴을 뼈까지 파먹고 들어간다. 업계에서는 ‘죽음의 왕관’으로 알려질 만큼 흔한 현상이다. 연어 양식장 한 곳에서만 자연 상태에서보다 3만 배나 더 많은 바다물이를 발생시킨다.
이러한 조건에서 살아남은 물고기들(연어 산업에서 사망률 10~30퍼센트 정도는 흔하다.)은 도살을 위해 수송할 동안 배설물을 줄이기 위해 7~10일 동안 굶긴 다음, 아가미를 베어 내고 수조에 던져 넣어 피를 흘리다 죽게 한다. 물고기들은 의식이 있을 때 도살되는 경우도 많으며, 고통으로 경련을 일으키면서 죽어 간다. 기절을 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요즘 기절시키는 방법은 신뢰성이 떨어져서 어떤 동물들에게는 고통을 더해 줄 수도 있다. 닭과 칠면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물고기의 인도적 도살을 요구하는 법은 없다.
그렇다면 자연산 물고기를 잡는 것이 더 인도적인 대안일까? 물론 자연산 물고기들은 비좁고 더러운 어장 안에서 살지 않아도 되니까 잡히기 전까지는 더 나은 삶을 산다. 그것은 중요한 차이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가장 많이 먹는 바다 동물인 참치, 새우, 연어를 잡는 가장 흔한 방법을 생각해 보자. 주로 세 가지 방법을 쓰는데, 주낙 어업, 트롤망 어업, 후릿그물 어업이 있다. 주낙은 장대가 아니라, 부표에 매달려 물속으로 연결된 전화선처럼 보인다. 본선에는 일정 간격을 두고 더 작은 ‘지선’들이 묶여 있으며, 각 지선에는 낚싯바늘들이 촘촘히 걸려 있다. 이제 이렇게 낚싯바늘이 걸린 주낙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십 개, 수백 개가 배 한 척에 차례대로 걸려 있는 모습을 그려 보라. GPS 위치 탐사 장치와 다른 전자 통신 장비가 부표에 부착되어 있어서, 어부들은 나중에 이를 회수할 수가 있다. 물론 주낙을 펼친 배가 한 척만이 아니고, 수십 척, 수백 척이 있으며, 최대 규모 선단의 경우는 수천 척에 이르기도 한다.
오늘날 주낙은 120킬로미터 길이에 달하는 경우도 있다. 영국 해협을 세 번 이상 건너는 길이다. 낚싯바늘이 대략 2700만 개가 매일 걸린다. 그리고 주낙은 ‘목표 어종’만 잡는 것이 아니라, 145종의 다른 어종도 죽인다. 한 연구에서는 대충 450만 마리의 바다 동물들이 해마다 주낙 어업에서 덤으로 잡혀서 죽는데, 이 중에 대략 상어 330만 마리, 녹새치 100만 마리, 바다거북 6만 마리, 앨버트로스 7만 5천 마리, 돌고래와 고래 2만 마리가 포함되어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엄청난 혼획을 만들어 내는 데에는 주낙도 트롤망을 따르지 못한다. 현대 새우 트롤망 어선 중 가장 흔한 형태는 대략 25~30미터 너비로 그 일대를 싹 훑는 것이다. 트롤망으로 몇 시간 동안이나 시속 4.5~6.5킬로미터로 바다 밑바닥을 쓸고 다녀서, 깔때기 모양의 그물 속에 새우(그리고 그 밖에 모든 것)를 쓸어 담는다. 트롤망 어업은 대부분 새우를 잡기 위한 것이지만, 열대우림을 마구잡이로 개간하는 것 못지않은 행태다. 목표가 무엇이건, 트롤망 어선들은 보통 물고기, 상어, 가오리, 게, 오징어, 가리비 할 것 없이 다른 물고기들 100여 종의 기타 어종들을 싹쓸이한다. 사실상 다 죽는다.
바다 동물들을 ‘수확하는’ 이런 초토화 방식에는 어딘가 상당히 불길한 데가 있다. 보통의 트롤망 조업은 혼획으로 잡은 바다 동물의 80~90퍼센트를 배 밖으로 던져 버린다. 사로잡은 바다 동물의 98퍼센트 이상을 죽은 채로 다시 바다에 던져 넣는 가장 비효율적인 작업인 것이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해양 생태 전체(과학자들이 최근에 와서야 평가하는 법을 알아냈다.)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감소시키고 있다. 현대 어업 기술은 더 복잡한 척추동물을 부양하기 위해 생태계를 파괴하고, 그 결과 식물과 플랑크톤을 먹고 살아남을 수 있는 극소수 종만을 남겨두고 있다. 인간이 참치나 연어처럼 보통 먹이사슬 맨 꼭대기에 있는 육식동물을 제일 많이 먹어 치워 포식자들이 없어지기 때문에, 먹이사슬에서 한 단계 아래에 있는 종들이 잠시나마 불어난다. 그러면 우리는 사라진 그 종들을 잊어버리고 더 낮은 단계의 종으로 옮겨 간다. 그러한 과정은 여러 세대에 걸쳐 이루어지기 때문에 변화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조부모님이 어떤 물고기를 먹었는지 아는가?) 어획량 자체가 양적으로 감소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현상 유지가 되고 있다고 착각하게 한다. 파괴 행위를 미리 계획하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시장 경제는 불가피하게 불안정성을 가져온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바다를 비우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콩 한 종류만 자라는 엄청나게 넓은 밭을 만들자고 수천 종이 사는 숲을 싹 베어 버리는 쪽에 가깝다.
트롤망 어업과 주낙 어업은 생태학적으로만 우려스러운 것이 아니다. 잔인하기까지 하다. 트롤망 어선에서는 다른 수백 가지 종들이 몇 시간 동안이나 함께 짓뭉개지고, 산호에 베이고, 바위에 패대기쳐진다. 그런 다음 물속에서 끌어 올려져서 고통스러운 감압을 겪는다. (감압 때문에 종종 물고기들의 눈이 튀어나오거나 내부 기관이 입으로 빠져나온다). 주낙에서도 동물들은 대개 천천히 죽음을 맞는다. 어떤 것들은 그저 그 자리에 매달려 있다가 줄에서 풀려날 때 비로소 죽는다. 어떤 것들은 입에 걸린 낚싯바늘이나 도망가려다가 난 상처 때문에 죽기도 한다. 어떤 것들은 포식자들의 공격을 피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어업 방식인 후릿그물은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해산물인 참치를 잡을 때 주로 쓰인다. 그물로 목표 어종의 주변에 벽을 둘러친다. 일단 물고기 떼를 둘러싸면, 마치 어부들이 거대한 지갑 끈을 당기듯이 그물 바닥을 당겨 조인다. 사로잡힌 목표 물고기와 옆에 있던 다른 생물들은 권양기로 끌어 올려져서 갑판에 부려진다. 그물 속에 뒤엉킨 물고기들은 그 과정에서 천천히 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바다 동물들 대부분은 배 위에서 죽는데, 그곳에서 의식이 있는 채로 천천히 질식하거나 아가미가 잘린다. 어떤 경우에는 물고기들을 얼음 속으로 집어 던지기도 하는데, 사실상 죽음이 연장되는 셈이다. <응용 동물 행동 과학>에 실린 최근 연구에 따르면, 물고기들은 완전히 의식이 있는 채로 얼음 속에 던져 넣어진 후 길게는 14분에 걸쳐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어 간다. (자연산으로 잡힌 것이나 양식된 것이나 마찬가지로 겪는 일이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먹는 것을 바꾸어야 할 만큼 중요한가? 우리가 사는 물고기와 물고기 제품들에 대해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라벨을 잘 붙이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 70센티미터 길이의 양식 연어가 욕조 한 개 크기와 맞먹는 곳에서 일생을 보내며 그곳은 오염이 너무 심해서 물고기의 눈에서 피가 흘러나온다고 알려주는 라벨을 사람들이 먹는 연어마다 붙인다면, 음식을 최대한 가려 먹는 잡식주의자들은 어떤 결론에 이를까? 라벨이 기생충의 폭발적 증가, 질병의 증가, 유전자의 퇴화, 양식업의 결과로 항생제에 내성이 생긴 새로운 질병에 대해 알려 준다면 어떻게 될까?
하지만 굳이 라벨이 없어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소나 돼지들 중 적어도 몇 퍼센트는 신속하고 주의 깊게 도살된다고 현실적으로 예상할 수 있다 해도, 물고기들은 편안한 죽음을 맞지 못한다. 단 한 마리라도. 당신의 접시 위에 올라 있는 물고기가 고통을 겪어야 했을지 궁금해할 필요가 전혀 없다. 고통을 겪었다.
물고기, 돼지, 그 밖에 다른 어떤 식용동물에 관해 이야기를 하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고통인가? 물론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초밥, 베이컨, 치킨 너겟보다 더 중요한가? 그건 문제가 된다.

 

6 동물을 먹는다는 것
우리가 음식을 먹는 것이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점 때문에 음식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일이 복잡해진다. 고고학적 기록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식탁에서 나누는 친교는 언제나 사회적 유대관계를 만들어 냈다. 음식, 가족, 기억은 원시 시대부터 연결되었다. 우리는 음식을 먹는 동물 이상의 존재이다.
나의 가장 소중한 기억 속에는 제일 친한 친구들과 주말마다 저녁 식사로 함께했던 초밥, 뒷마당에 상을 차리고 겨자와 구운 양파를 넣어 먹었던, 아버지가 만든 칠면조 버거, 유월절에 할머니 댁에서 먹었던, 짭짤한 게필테 피시의 맛이 있다. 그 음식들 없이는 기억이 똑같을 수가 없다. 그것이 중요하다.
초밥이나 통닭구이의 맛을 포기한다는 것은 즐거운 식사 경험을 포기하는 것을 넘어서는 손실이다. 먹는 것을 바꾸고 기억에서 맛이 희미해지도록 놔둔다면 일종의 문화적 손실이라 할 망각이 발생한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망각은 아마도 받아들일 가치가 있을 것이다. 계발하는 것보다도 훨씬 가치 있다. (망각도 계발될 수 있다.) 동물들과 동물들의 복지에 대한 나의 관심을 기억하기 위하여, 어떤 맛은 잃어버리고 그 맛들이 한때 나에게 가져다주었던 기억들에 대한 다른 단서를 찾아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기억하기와 망각하기는 동일한 정신적 과정의 일부이다. 어떤 사건 중 한 가지 세부만 기록한다는 것은 또 다른 것은 기록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영원히 쓰기를 계속하지 않는 한은.) 한 가지를 기억한다는 것은 또 다른 것을 기억에서 지운다는 뜻이다. (영원히 회상하기를 계속하지 않는 한은.) 폭력적 망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망각도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 온 모든 것을 다 지킬 수는 없다. 그러므로 문제는 잊었느냐 잊지 않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혹은 누구를 잊었느냐이다. 우리 식단을 바꿀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바꾸느냐이다.
요즈음 나는 친구와 채식주의자용 초밥을 먹고 인근의 이탈리아 식당에 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구워 주셨던 칠면조 버거 대신, 내 아이들은 내가 뒷마당에서 굽는 채식주의자용 버거를 기억할 것이다. 지난 유월절에 게필테 피시는 식탁 한가운데에서 약간 밀려났지만, 그 음식을 놓고 할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분명히 멈추지 않았다.) 약자들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식으로 강자들을 제압한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웅장한 이야기인 탈애굽기와 함께, 약자와 강자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들이 덧붙여졌다.
그 특별한 음식들은 특별한 때에 특별한 사람들과 함께 먹으면서, 우리는 신중하게 그 음식들을 다른 음식들과 따로 떼어 놓았다. 신중함을 한 겹 더 덧씌우자 풍요로워졌다. 나는 좋은 명분을 위해서라면 전통과 타협하는 데 대찬성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전통은 타협하기보다는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공장식 축산 돼지고기를 먹거나 가족에게 그것을 먹이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행동이다. 아무리 말하기 어렵더라도, 공장식 축산 돼지고기를 먹는 친구 옆에 입 다물고 앉아 있는 것도 잘못된 행동일지도 모른다. 돼지들은 분명히 다채로운 정신세계를 지니고 있으나, 공장식 축산으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할 운명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좀 너그러운 비유이기는 하지만, 벽장 속에 갇힌 개를 비유로 든다면 꽤 정확할 것이다. 환경 문제와 관련해서 공장식 축산 돼지고기를 먹는 데 반대하는 근거는 물 샐 틈 없이 완벽하고 철저하다.
비슷한 이유로, 나는 공장식으로 생산된 가금류나 해산물도 먹지 않는다. 그들의 눈을 들여다볼 때 돼지와 눈을 맞출 때만큼 연민의 정이 우러나지는 않지만, 마음의 눈으로는 그만큼이 보인다. 조사하면서 새와 물고기의 지성과 세련된 사회생활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들이 겪는 불행의 강도가, 비교적 더 파악하기 쉬운 공장식 축산 돼지들의 불행에 비해 결코 못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육장에서 키운 쇠고기라고 더 참을 만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도축 문제를 잠시 제쳐둔다면, 100퍼센트 목장에서 키운 돼지고기가 아마도 모든 고기들 중에서 그나마 제일 덜 괴로울 것이다. 다음 장을 보면 더 그럴 것이다.) 하지만 돼지나 닭을 키우는 공장식 축산업보다 덜 불쾌한 얘기를 하려면 가능한 한 적게 말하는 수밖에 없다.
나에게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세계의 일부 지역과는 달리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다른 음식들을 쉽게 구할 수 있으므로 어느 모로 보나 우리 가족이 반드시 고기를 먹어야 할 필요는 없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고기를 꼭 먹어야 할까? 나는 동물을 아주 즐겨 먹었던 사람으로서 이 문제에 대답하겠다. 채식주의 식단도 풍성하고 즐거울 수 있지만, 솔직히 많은 채식주의자들이 애써 우기듯이 고기가 포함된 식단만큼 풍성하다고 주장하지는 못 하겠다. (침팬지를 먹는 사람들은 서구식 식단을 보면서 큰 즐거움이 빠졌다고 슬퍼할 것이다.) 나는 초밥을 좋아하고, 프라이드치킨도 좋아하고, 질 좋은 스테이크도 좋아한다. 하지만 좋아한다 해도 한계가 있다.
공장식 축산업의 현실을 알게 된 이후로는, 전에 먹어 왔던 고기를 거부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다. 거기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들 말고는, 공장식 축산업을 누가 옹호할지도 상상이 잘 안 되었다.
하지만 폴 윌리스의 돼지 농장이나 프랭크 리스의 가금류 농장의 경우에는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나는 그들이 하는 일을 인정하며, 대안을 고려한다면 그들을 영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자기들이 키우는 동물을 잘 돌보아 주고,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잘 알며, 자기들이 아는 대로 다룬다. 우리 소비자들이 땅의 수용 능력에 따라 돼지고기와 가금류에 대한 욕망을 억제할 수만 있다면, 그들의 축산에 반대할 만한 절대적인 생태적 논쟁거리는 없다.
어떤 종류든 동물을 먹는다면 고기 수요가 늘어남으로써 간접적으로라도 반드시 공장식 축산업을 돕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는 사소하다고 할 수 없지만, 내가 폴 윌리스 농장의 돼지고기나 프랭크 리스 농장의 닭고기를 먹지 않으려 했던 것이 딱히 그 때문만은 아니다. 폴과 프랭크는 이제 내 친구가 되어서 이 글을 읽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여기에 쓰기 어려운 다른 이유가 있다.
폴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다 하고 있지만, 그의 돼지들은 여전히 거세를 당하고, 도축되기 위해 장거리를 이동한다. 윌리스도, 니만 목장과 함께 처음부터 그의 일을 도왔던 동물 복지 전문가 다이앤 할버슨을 만나기 전에는 돼지 꼬리를 잘랐다. 아무리 친절한 농부일지라도 가끔은 자기 동물들의 복지에 대해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다음으로는 도축장이 있다. 프랭크는 수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칠면조들이 도축되도록 하는 문제에 대해 아주 솔직하게 터놓고 말한다. 그의 새에게 최적의 도축장은 아직도 미결 과제로 남아 있다. 돼지 도축장에 관한 한 파라다이스 로커 미트 사는 정말 천국 같은 곳이다. 육류 산업의 구조와 USDA 규제 때문에, 폴과 프랭크 둘 다 자기네 동물들을 완전히 뜻대로 통제할 수 없는 도축장에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듯이 어느 농장에나 흠이 있고, 우연에 좌우되며, 제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도 있다. 살다 보면 불완전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냥 넘길 수 없는 것이 있다. 도대체 축산업과 도축이 얼마나 더 결함투성이라야 도를 넘었다고 할 것인가? 사람들마다 제각기 폴과 프랭크네 같은 농장들을 달리 볼 것이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으로선, 지금 우리 가족은, 고기가 무엇이며 무엇이 되었는가의 현실에 관심을 갖는 한 고기를 전적으로 포기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어떤 상황에서는 내가 고기를 먹게 되리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개를 먹어야 할 상황조차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아마도 그런 상황에 맞닥뜨릴 것 같지는 않다.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할 수 있는 틀이며, 나는 고기를 먹을지를 놓고 끊임없이 개인적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태에서 이미 벗어난 지 오래이다. (그 상태로 무한정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런 상황은 베를린 수족관에서 물고기 앞에 선 카프카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고기를 먹지 않기로 결심한 후로, 새롭게 찾은 평화 속에서 그의 시선이 한 물고기에 가 닿는다. 카프카는 그 물고기가 자신의 보이지 않는 가족임을 깨달았다. 물론 자기와 대등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또 다른 존재로서, 나는 파라다이스 로커 미트 사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마리오의 도축실로 가는 길에, 죽음을 목전에 둔 돼지의 시선에 문득 놀랐다. (당신은 누군가의 눈에 마지막으로 비친 모습이 되어 본 적이 있는가?) 하지만 전적으로 수치스러운 기분만도 아니었다. 돼지는 내 망각을 담는 그릇이 아니었다. 그 동물은 내 관심을 담는 그릇이었다. 나는 그 점에서 위안을 느꼈고, 지금도 느낀다. 나의 위안이 그 돼지에게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 나에게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이것이 내가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다. 지금으로서는 먹히는 쪽이 아니라 먹는 쪽의 입장에 서서 그렇게 빤히 다 알면서 고의적으로 망각할 수는 없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가족도 있다. 조사가 끝났으니까, 농장 동물들의 눈을 들여다볼 기회는 이제 드물 것이다. 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삶의 많은 날들에, 아들의 눈을 들여다볼 것이다.

나는 고기를 먹지 않기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 결정은 한계가 있으며, 개인적인 것이다. 그것은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내 삶의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 서약이다. 나의 논리 중 상당 부분은 산업화된 축산업이 지배적인 형태가 아니었던 60년쯤 전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내가 다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다른 결론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고기를 먹지 않기로 굳게 결론지었다 해서 남들이 고기를 먹는 데 대해 반대한다거나,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는 뜻은 아니다. ‘교훈을 주기’ 위해서 아이를 때리는 것에 반대한다고 해서 부모의 엄격한 훈육을 반대한다는 뜻은 아니다. 내 아이를 이런 식으로 훈육하고 저런 식으로는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해서 그것이 반드시 다른 부모에게도 내 결정을 강요하겠다는 얘기는 아니다. 자기 자신과 가족을 위해 결정하는 것이 한 나라나 전 세계를 대신하여 결정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고기를 먹는 것에 관한 우리 모두의 개인적 성찰과 결정을 나누는 데 가치를 둔다 해도, 단지 개인적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이 책을 쓰지는 않았다. 농장 경영은 음식의 선택만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개인적으로 식단을 선택하는 것으로는 모자란다. 하지만 최상의 대안적 축산업에 대한 나의 관점과 결정을 어디까지 고수해야 할까? (폴과 프랭크의 제품을 먹지는 않겠지만, 그들의 축산을 지원하고픈 열의는 꾸준히 깊어졌다.) 다른 사람들한테서 내가 무엇을 기대하는 걸까? 고기를 먹는 문제에 이르면,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무엇을 기대해야 할까?
공장식 축산업을 그저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정도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내가 어떤 결론을 내야 할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공장식 축산업이 동물들에게 잔인하며 생태적으로 비경제적이고 오염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모두가 계속해서 공장식 축산 제품을 보이콧해야 할까? 보이콧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공장식으로 생산되지 않은 식품을 우선하여 구매하는 식으로 그 시스템에서 슬쩍 물러나는 것으로 충분할까? 우리가 개인적으로 선택해서 구매할 것이 아니라, 법제화와 집단 정치 행동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할까?
누군가와 정중하게 의견을 달리해야 할 지점은 어디이고, 더 중요한 가치를 위해 내 입장을 고수하며 남들에게도 내 편에 서 달라고 요청해야 할 지점은 어디일까? 어떤 경우에 이성적인 사람들이라도 합의한 사실을 놓고 의견을 달리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또 어떤 경우에 그 합의한 사실들로 행동을 취해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고기를 먹는 것이 항상 모든 이들에게 잘못된 행동이라든가, 육류 산업이 현재 상태는 유감스러울지라도 가망이 없다고 주장한 적은 없다.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해 어떤 입장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의 기본이 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Greg으로부터: 이런 멋진 책을 준 김혜나에게 감사합니다.

 

One thought on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 Jonathan Safran Foer

  1. We are what we eat
    어떤걸 먹느냐 무얼 먹느냐은 결국 나란 몸을 만든다.
    바른 음식이 바른 나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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