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原始)로 돌아가기 : 유기적 지능 배양을 위한 통합적 수련으로서 아쉬탕가 빈야사 요가와 명상의 활용

Becoming Animal: Using Ashtanga Vinyasa Yoga and Meditation as Embodiment Practices for the Cultivation of Organic Intelligence – Iain Grysak

원시(原始)로 돌아가기 : 유기적 지능 배양을 위한 통합적 수련으로서 아쉬탕가 빈야사 요가와 명상의 활용[1]

이언 그라이섹

최근에 내 마이솔 클래스(Mysore class)에서 수련하는 학생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

어떤 동작을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열려있는 경우 열린 쪽으로 깊게 자세를 취하려고 하게 되는데 열린 쪽과의 균형을 위해 이것을 자제해야 할까요?”

내가 느낀 바에 의한 나의 답변은 아쉬탕가 빈야사(Ashtanga Vinyasa) 수련의 가장 아름다운 측면들 중의 하나이다.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부연 답변은 다음과 같다 :

 

“의식적으로 육체의 본질적인 지능(organic intelligence)[2]을 조종하려고 하지 마세요. 동작과 빈야사(vinyasa)의 시퀀스에는 수년간의 매일 수련을 통해 몸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심오한 지혜가 담겨있습니다. 또한 우리 몸은 타고난 고유의   본질적인 지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몸의 지능은 매우 유능한 해부학자조차도 밝힐 수 없는 매우 복잡한 수련의 지능과 상호반응을 일으키게 됩니다.

구조적으로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긴장통합체(tensegrity)[3] 패턴의 경우도 고유의 지능을 지니고 있는 복잡한 망구조 상에 존재하게 됩니다. 수련이 구조적으로 우리 몸과 긴장통합체 패턴에 영향을 미치게 되면, 이러한 패턴들의 정교한 전이, 변화 또는 진화 등이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표면적으로 관찰하게 되는 것들은 예를 들면 우리 몸의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덜 열려있다거나 일시적인 통증 등의 때때로 비논리적이거나 반직관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 없는 수많은 복잡한 패턴 중 어떤 것이 덮개 밑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볼 수 있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시적인 우리 몸의 외부적 표현은 보다 광대한 내부 프로세스의 부산물인 경과 현상에 불과하고 우리 몸의 본질적이고 내재적인 지능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 몸의 변화를 위해 의식을 개입시키는 것을 자제하세요. 왜냐하면 의식은 매우 제한적인 정보 즉, 표층적인 외부적 표현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의 타고난 지성이 최상의 방법으로 보다 심층의 내부 프로세스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세요. 이것은 보다 이완된 상태입니다. 한 발 물러서 의도적인 조작을 필요로 하지 않는  그 무엇을 따르세요. 당신의 모든 동작과 빈야사를 섬세함과 알아차림과 함께 매일 순서대로 수련하도록 하세요. 몸에 특별한 증상이 나타나더라도 계속 수련하세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물러서지 마세요. 어떤 날 몸이 거부하는 경우가 생겨도 그것을 직면하세요. 하지만 그것을 강요하지는 마세요. 그 거부감을 인정하세요. 그 거부감을 느끼되 그것을 너무 강하게 밀어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수련을 지속하면서 우리 몸의 구조가 시간이 거듭될수록 전이, 변화 그리고 진화하는 동안 긴장과 이완 패턴이 전이, 변화 그리고 진화하는 마법이 펼쳐지는 것을 바라보세요.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여정입니다.”

 

나는 지난 13년간 현대적인 시퀀스(sequence)의 변형 없이 아쉬탕가 요가(프라이머리 시리즈에서 어드밴스드 B 시리즈)를 매일 수련해왔다. 위의 내용은 나의 개인적 경험과 나와 함께 수련했던 수백명의 학생들을 관찰하면서 어떻게 아쉬탕가 빈야사 시스템이 가장 인간의 신체에 효과적이면서도 건강하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나의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 우리가 일차적으로 감지하는 “굴복한다(surrender)” 라는 개념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난 지혜라는 것이 위에서 언급한 이야기의 주제이다.

나는 이 “굴복한다” 라는 것이 건강한 정신의 본질적 특질이라고 믿는다. 인간의 정신은 개념화 그리고 내부 및 외부 환경을 통제하고자 하는 강력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매우 대단한 능력이고 우리는 이것을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또한 이완은 굴복과 통제의 완화 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만약에 우리가 항상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을 통제하고 조작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지속적인 스트레스 상태에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병적인 상태이다. 스트레스는 모든 생명체에게 있어 유해하다. 어느 정도의 긴장은 생명체에게 존재를 위해 필요하고 어느 정도의 지적 개념화와 조작은 우리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주기는 하지만 다양한 긴장(또는 스트레스)과 이완(또는 굴복) 상태의 균형은 가장 효과적이고 건강에 도움이 된다. 이러한 균형은 또다른 형태의 반다(bandha)이다.

정신적 또는 종교적 시스템에서는 “굴복하다” 를 해방이나 자유에 도달하기 위한 필수요소 중의 하나라고 이야기한다. 나의 다른 글에서 이러한 굴복이 얼마나 자주 개인이 자신의 능력을 신, 스승, 법, 개념, 가상 또는 도달 불가능한 사상 등에 내어주는지에 대에 논의한 바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굴복한다는 것은 사람이 미묘하지만 강력하게 지배당하거나 통제되고 자신을 불신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현대 종교와 영성 (靈性,spirituality)이 인류의 굴복하고자 하는 타고난 본능을 강조하고 이것에 고귀한 추상적인 신, 스승, 하늘 그리고 해방 등의 이상 등의 굴복해야 되는 대상의 개념을 덧붙임으로써 인류 문화에 뿌리를 내리고 드러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현대적 형태의 종교와 영성이 농경이 시작된 1만년 전부터 존재 했고 현대 인구수가 이때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렇게 폭발적으로 증가한 인구를 점점 더 인위적이고 세분화된 업무 (예를 들자면, 현대 인류 사회)에 근거한 점점 더 상호 협조적인 네트워크로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한 필요성은 보편적인 이념, 보편적인 근거 없는 믿음, 우리가 동조하고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공유 가능한 이야기를 필요로 했다.

신성이라고 주장하는 그러므로 언젠가는 죽게 되고 불완전한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정신적 또는 종교적 개념은 이러한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였다. 초창기 현대 인류는 자유, 천국, 구원, 또는 영원한 평화를 얻기 위하여 우주를 다스리는 고차원적인 능력인  신, 스승, 개념, 해방과 관련된 이상 등에 굴복하게 되었다.  이것은 인류사회가 우리가 만든 꿈의 거품에 살면서 지구상의 모든 종들의 상호관계망의 일원으로서의 우리의 고유의 동물적 근원과의 연관성은 거의 배제된 오늘날의 수준까지 다다르기 위해서 상호 협조와 개체수 증가를 계속해 왔음을 매우 효과적으로 입증한다.

이것은 농업혁명의 초창기에 인류의 수적 증가를 초래하였다. – 또한 인류의 유전자 복사본의 증가는 생물학적 진화가 진행될수록 성공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인류의 여정 중 이 단계에서 몇 가지 생물학적 진화의 법칙을 초월하면서 우리는 커다란 위기에 도달하게 되었고, 우리가 우리의 세계관과 현실을 극적으로 전환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존은 위태로워지게 될 것이다.

만약 굴복이 건강한 인류의 타고난 특징이라면 1만년 전 농업, 현대 종교 그리고 영성의 출현 이전부터 인류의 정신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복종하도록 학습되어진 새로운 추상적인 종교적 개념이 인간이 비교적 최근에 출현한 농업, 현대 종교 그리고 영성 이전에 인류가 존재했던 오랜 기간 동안 인간의 정신적 굴복하는 능력을 전복시켰을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1만년 전에 인류가 수렵채집집단형태로 존재하고 있었을 당시에는 마음에 굴복하는 것은 타고난 생물학적 지능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농경이전시대의 인류의 인식세계에 대해 명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존재하고 있는 일부 수렵채집집단의 문화인류학적 관찰과 내가 속해있던 다양한 환경과 생활패턴에 대한 나의 의식의 행동방식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농경시대 이전에의 인류는 대체로 고유의 동물적 상태의 지능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과 직관의 측면에서 커다란 자신감을 부여하는 자각의 아름다운 형태 중 하나일 것이다. 이러한 인식과 자각의 상태는 오늘날 존재하는 이성과 분석이 지배하는 정신과는 다르다.

현대 인류사회의 네트워크의 도움 없이 숲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인간의 감각기관과 인지기관은 고도로 발달했었을 것이다. 평생 동안 개개인이 개발하고 습득한 다양한 지적 기술들은 매우 방대할 것이다. 이러한 것을 해낼 수 없었던 자들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포괄적인 상태는 이러한 생존의 두드러진 특징일 것이다. 의식은 일반적으로 육체적, 생물학적 개체라는 틀에 머무르게 되고 이것은 타고난 본질적인 지능인  매우 깊은 신뢰(또는 굴복)로 이끌기도 한다. 나는 이것이 매우 완벽하고 통합적인 삶의 방식이고, 이러한 삶을 살았던 이들에게는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존재의 위기와 단절감은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종간 상호 연결망을 통해 즉각적으로 인지하는 통합적인 삶은 모든 측면에서 충만하고 완벽하기 때문에 원대한 영적 포부 같은 것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We are Nature” by Edward Foster

현대인류는 현재 우리가 속해있는 행성을 말 그대로 독살하려 하면서 거기에 생존을 의지하고 있는 위기에 직면해있다.  머지않은 미래에 지구는 더 이상 인류 생활에 호의적이지 않을 것이고 인류는 곧 멸종하게 될 수도 있다. 나는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지난 1만년 동안 우리의 정신이 직관, 본능, 본질적인 지능을 근간으로 한 자각에서 전적으로 인간 정신의 추상적 건축물인 현실과 존재로 옮겨갔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우리의 자아감과 자각은 이제 우리 몸과 우리가 구성원으로 속해있는 행성의 근본적인 물리적 현실보다는 이러한 상상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에서 비롯한 견해나 제안에서 비롯된다.

최근 테드 토크(TED talk)에서 작가이자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Yuval Harari)는 실재적이고 자연법칙상의 현실과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인간이 창조한 상상의 허구적 현실의 차이점을 명료하게 설명하였다. 나무, 강, 바람, 바위, 동물 그리고 우리자신의 본질적인 직관적 지능의 실재적이고 자연법칙상의 현실은 우리의 생물학적 유산이다. 이것이야말로 농업혁명이 일어나기 전 수백만년 동안 존재하던 것이다. 지난 1만년 동안 특히 최근에 실재적이고 자연법칙상의 현실은 대부분 인간의 정신세계에 의해 창조된 상상의 허구적 현실로 대체되었다. 돈, 국가, 문화, 기업, 법률, 종교, 천국, 지옥 그리고 신 이 모든 것들은 자연법칙상의 현실에 토대를 두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생활습관, 행동 그리고 의사결정을 인류가 창조해낸 이러한 가상의 개체들에  거의 전적으로 기초하고 있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강연에서 이러한 상상의 개체들이 실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인간의 상상이 세력을 키워가는 것과  호수, 강, 나무 그리고 동물 같은 실재하는 현실이 등한시, 학대, 파괴 되기 시작한 것이 같은 시점이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지구상 생물학적 개체들의  실재하는 현실이 잊혀지고 등한시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본능적, 본질적, 직관적인 인간의 지능 또한 무시되고 버려지고 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사결정과 행동의 대부분이 체화된 경험 수준에서 자기 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감지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으로부터 비롯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솔직히 매우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의사결정과 행동은 사회, 문화, 가족, 직장, 종교, 경전, 그리고 우상 등으로부터 유래한 날조된 이데올로기나 기대에 기초하고 있다.

현대인류는 그들의 신념과 굴복을 위한 수용능력을 어디에 두는가? 추상적, 가상의 개념에 두는가 아니면 우리 몸이나 존재의 직관적인 본질적 지능에 두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개인의 마음속에 생기는 행복과 하나의 종으로서의 집단적 문제의 양 측면에서 오늘날 세계가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를 요약해주고 있다고 본다.

만약 영적 수련을 해결책의 일부로 본다면, 우리는 이것을 문제를 계속적으로 일으키는 데에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이 글의 초반에서 현대의 영성과 종교는 추상화와 가상의 현실을 만드는 과정 중에 발생한 것이라고 이미 언급한 바 있다. 허구적인 이상에 굴복함으로써 우리의 힘을 내어주기를 요구하는 영적 수련은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상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늘날 존재하는 거의 모든 종교와 수련방법이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

도움이 되는 수련방법은  우리 신체와 존재의 직관적이고 본질적인 지능을 배양하고 궁극적으로는 그것에 굴복함으로써 우리 자신과의 관계를 재발견하고 심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신뢰, 자신감, 또한 일체감을 증대시킨다. 우리는 우리의 신념과 믿음을 이상이나 신념에 내어주는 것을 중단하고 우리의 본질적인 지능 속에서 우리의 신념을 배양시켜야 한다. 우리는 변화무쌍한 신, 직장, 국가, 문화 그리고 돈 등에 굴복하기를 멈추고 동물로서의 인간의 육체 속에 내재되어 있는 힘과 지능에 복종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실재적이고 자연법칙상의 본성에 다시 연결되고 그것을 존중함으로써 우리는 자연적으로 나무, 강, 바위 그리고 동물이라는 실재적인 현실에 다시 연결되고 그것을 존중하게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의 육체를 통해 자연으로 돌아가는 여정이 시작되게 되는 것이다.

“The Awakening” by Edward Foster

이것은 모두에서 언급한 아쉬탕가 빈야사 수련 과정에 대한 설명으로 돌아가게 한다. 나는 16년째 현재 지구상에서 존재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련방법 중 두가지인 아쉬탕가 빈야사 요가와 비파사나 명상(Vipassana meditation)을 수련하고 있다. 이것들 또한 인간 정신의 산물인 만연한 신조와 이데올로기와 연관되어 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이것이 이 두 기법들을 둘러싸고 있는 철학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인류가 창조한 허구적 현실 중 일부는 긍정적이고 유익할 수 있다. 그러나 16년간의 편견 없는 수련과 실험 후 나는 이런 기법들이 나에게 효과가 있었던 것은 그것들이 연관되어있었던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기법들을 나의 의식을 구현하고 나의 본질적인 지능의 능력을 개발하는데 사용했기 때문이었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움직이지 않은 채로 앉아서 명상을 하면서 내 신체 각부분과 존재를 통해 감각의 미묘한 변화를 경험할 때나 내 몸과 호흡을 통해 땀을 많이 흘리는 어드밴스드 아사나(advanced asana)와 빈야사로 구성된 시퀀스를 수련할 때에도 내가 하고 있는 본질은 동일하다. 내가 이 두가지 중 어느 것을 수련하더라도 나는 내 이성과 분석적인 마음을 떠나 보내고 나를 덮고 있는 인간이 만든 사상의 지배를 떨쳐버리며, 본질적인 지능과 내 몸이 느낀  자연법칙상의 실체와 그 느낌의  보다 깊은 차원으로 내려가고 또한 그것에 복종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아사나(asana)는 육체를, 명상은 마음을 수련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나에게 이 두 가지는 단지 동일한 것의 다른 측면일 뿐이다.  이들은 모두 우리의 직관과 본능적인 지능의 민감도를 배양시키고 심화시켜주는 데에 매우 효과적인 신체에 중점을 둔 수련이다. 이 두 가지 기법 모두에 있어서, 이성과 분석적 이해를 요하는 학습단계가 있다. 비파사나 명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 신체부위에  의식을 집중하고 관찰하고 느끼고 이동해야 하는지, 어디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지 등을 배워야 한다. 아쉬탕가 빈야사 기법에서는 우리 몸 속에서 호흡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아사나와 빈야사의 순서는 어떻게 정할 것인지, 정렬의 기본원칙에 입각해 어떻게 자세를 취할 것인지 등을 배울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기법의 매우 표층적인 측면일 뿐이다. 이것들은 다만 직관적이고 본능적으로 흐르는 의식의 상태를 향해 열려있는 출입구에 불과하다.

비파사나 명상 수련이 무르익게 되면, 의식은 거의 자각을 지시하지 않게 된다. 몸을 통해서 자각을 이동시키고 감각의 세포적 경험을 어디서나 느끼는 방법을 배우게 되면, 마음을 지배하는 의식이 한걸음 물러서게 되고 프로세스의 직관적 측면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된다. 많은 명상 중에 나는 내 몸을 스캔하고 느낄 수는 있지만 나의 의식은 정지해있고, 무의식적인 꿈과 시각 그리고 이미지가 주도적인 나의 정신적 경험이 되는 꿈의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이것은 의식적인 이상이나 이데올로기가 더해지지 않은 채로 자발적으로 일어난 정신적 이미지와 패턴에 대응하는 체세포 수준의 자각의 가장 미묘한 층과 같이 매우 깊은  본질적인 레벨에서 자아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단계에서 작용하는 것들은 매우 치유적이고 명확하며 회복적이다. 깊은 때로는 파괴적인 정신의 패턴이 방해 받기도 하고 변경되기도 한다. 마음이 실제 수면과 꿈에서 얻고자 하는 상당부분이 이러한 명상을 통해 성취될 수 있기 때문에 수면과 꿈에 대한 요구가 의미심장하게 줄게 된다.

아쉬탕가 수련이 원숙해지게 되면, 의식의 지시가 최소화되게 된다. 일단 올바른 빈야사 시퀀싱(vinyasa sequencing)과 호흡 및 정렬원칙을 배우게 되면 이제 남은 일은 자신의 분석적인 마음을 멈추고 본능적이고 직관적으로 수련하는 것이다. 이때가 바로 마법이 일어나게 되는 시점이다. 마음이 단순하게 호흡과 육체의 움직임(특히 반다와 연결된 미묘한 내부의 움직임)을 따라 흘러가게 되면 타고난 육체가 얻게 된 다양한 지능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 몸은 직관적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또는 어떻게 움직여서는 안 되는지를 알고 있다. 또한 어떻게 호흡을 확장시키고 속도를 늦추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동작을 더 깊이 들어가야 하는지 그리고 언제 물러서야 하고 어떤 형태의 저항력에 저항해서는 안 되는지를  알고 있다. 원숙한 수련자들 중에는 “어떤 또다른 힘”이 수련 중에 그들의 몸과 호흡을 움직이는 상태를 경험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힘은 분명히 반다와 연관되어 있겠지만 이러한 힘의 본질은 타고난, 직관적인 동물적 지능이다. 수련할 때 이러한 지능에 굴복한다는 것은 매우 기분 좋은 느낌이다. 의식적이고, 분석적인 마음이 그것의 아이디어와 이상으로 수련을 덮게 되고  본질적인 지능을 전복시키게 된다면,  자기신뢰, 자신감, 그리고 자아수용의 결핍의 문제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또한 부상의 원인이 될 것이다.

의식적이고 객관적인 호흡 또는 정렬기법의 분석은 수련을 갓 시작했을 때처럼 어떤 경우에는 때때로 유익하며 필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지능을 포함하고 배양하는 기법인 원숙한 수련이 가능한 경우에는 이러한 의식적 분석이 에너지와 주의집중을 지휘하는 데에 있어서 매우 적은 비중만을 차지하여야 한다. 분석적이고 객관화하는 수련은 존재의 완전히 직관적이고 본능적인 상태로부터 흐르는 수련보다 훨씬 더 피상적 수준의 수련이다. 이러한 직관적인 방향으로 수련이 가능하다면, 그룹 또는 선생님의 지도하에 수련하는 것 보다 고립된 곳에서의 셀프 수련이 보다 바람직할수도 있다. 나는 종종 내가 한해의 거의 대부분을 선생님의 지도 없이 혼자 수련하는 것이 괜찮은가 또는 선생님 없이 혼자 수련하는데도 나 스스로 깊은 수련과 수련의 진전이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사실 대부분의 나의 가장 깊은, 가장 아름다운, 그리고 가장 강력한 수련은 내가 가장 친근한 장소에서 깜깜한 새벽에 나홀로 있을 때이다.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지 않게 될 때 완전히 통합적인 상태로 들어가기 가장 쉽다. 혼자 어둠에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다 많이 느낄 수 있게 된다.

때때로 선생님을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만약에 좋은 선생님 근처에 사는 행운이 있다면 대부분의 수련을 그 선생님의 샬라(shala)에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숙련된 수련자들은 그들의 수련에 있어서 최대한 독립적이어야 한다. 선생님에게 “자신의 보다 깊어지기”를 의존한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내어놓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을 선생님의 능력에 의지하게 만들고 자신의 굴복하는 능력과 자신의 직관적이고 본질적인 지능에 대한 자신감을 약화시키게 된다.

훌륭한 선생님은 이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는 학생이 언제 자신의 본질적인 지능에 접근할 수 있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으며 또한 이때 그들의 수련에 극히 작은 조언과 외부적 지도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불필요한 시점에 조언이나 자세교정을 제공하는 것은 학생의 내부적 프로세스에 지장을 주게 된다. 나 또한 지도자로서 나의 경험과 수련이 보다 원숙해짐에 따라 최소한의 조언을 제공함으로써 학생들이 수련실 안에서 자신의 내적 여행을 펼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보다 주안점을 두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최상의 순간은 뒤로 물러나 수련실을 가득 채운 20여명의 학생들을 살피면서 이 순간에 내가 아무것도 개입할  필요가 없음을 느낄 때이다. 학생들 개개인의 숨소리만 들리고 각자가 자신의 내적 여행에 몰입해 있다. 이때가 바로 단체 수련의 마법이 일어나는 때이고, 각자가 자신의 타고난 의식의 직관적인 동물적 상태에서 수련하는 순간이다.

학생이 어떤 어려운 동작을 연습하기 위해 도움을 필요로 하거나 또는 비효율적인 움직임 패턴에 고착되어 있다면 물론 그때에는 그들을 일정기간 동안 도와준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 스스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고 생각되면 나는 그들 스스로 하도록 내버려 두고 그것을 관찰한다. 동물적 지능이 이 단계를 점유한 것을 바라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데에 있어서 개개인마다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내가 학생들에게 강력하고도 매우 세밀한 정렬을 강요하지 않는 이유이다. 내가 지도자로서 가장 뿌듯한 순간은 내가 학생들이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도록 육체적으로 또는 구두로 도와줄 때가 아니라 그들이 내 도움 없이 그들 스스로 그것을 성취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 이다. 이것은 단지 인간의 신체와 신경계의 본질적인 지능에 접근하고 그것을 배양하는 육체적 측면의 요가와 명상만을 통해서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니다. 이미 이 글의 초반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의 수렵채집선조들은 아마도 대부분의 시간을 이러한 상태에 머물러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생활과 그들의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 강, 바람, 바위, 그리고 나무와의  감각적인 관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을 것이다. 그들은 위대한 전체의 일부이며 이러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이러한 포괄적인 상태에서 사는 것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활동적이고 동시에 감각적이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모든 활동들이 이러한 본질적인 지능을 배양하고 심화시키고 그것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심화시키는 데에 도움이 된다. 하이킹이 이러한 활동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다. 내가 요가와 명상을 접하기 오래 전부터 나는 좋은 친구들과 자주 하이킹을 하곤 했었다. 우리는 늦은 밤에 숲으로 가서 안내하는 불빛 없이 숲길을 걷는 것을 즐겼다. 우리는 발을 헛딛거나 넘어지지 않고 숲을 느끼고 길을 찾아가기 위해 시각을 제외한 다른 능력들을 사용하기도 했다. 인체의 타고난 능력에 복종하게 되면 이러한 기술을 쉽사리 매우 단시간에 발달시킬 수 있다. 일행중의 한 친구는 자연적으로 달리기도 하고 또다른 친구는 숨어있는 장애물들을 처리하면서 갑자기 나타나는 바위, 나무, 급커브 또는 모퉁이에 대해 매우 빠른 판단을 계속 내리기도 했다. 상황들이 분석적 정신으로 결정을 내리기에는 너무 빨리 일어났다. 길을 안내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타고난 본능적인 육체적 지능 뿐이었다.

이것은 몇 주 전에 내가 발리의 구눙 아방(Gunung Abang)에 올라갔다 산길을 내려올 때의 멋진 경험을 생각나게 한다. 그 길은 매우 좁고 가파랐으며 커다란 바위, 나무 뿌리 그리고 침식된 도랑 등이 많이 있었다. 나는 매우 천천히 주의 깊게 바닥을 살피며 적당한 위치에 발을 디디며 내려가고 있었다. 대단히 가파른 지점에 다다르고 나서 이렇게 천천히 조심스럽게 내려가는 것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고 있었을 때에 나는 달리기 시작했고 그것을  계속했다. 나는 속도를 더 올렸고 바위, 나무, 도랑 또는 모퉁이는 그대로 있는데 매우 빠른 판단을 내릴 때와 유사한 경험과 같이 갑자기 내 몸이 길을 따라 날아 내려가고 있었다. 매 움직임을 계산해야 한다는 스트레스를 떠나 보내고 내가 속도를 늦춤에 따라 내 몸의 본능적인 자연스러운 반응들이 내 길을 안내하는 것을 따르면서 커다란 자유를 느끼게 되었다. 빠른 속도에서 잘못 움직이게 되면 심각한 부상을 당할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몸의 본질적인 지능에 대한 나의 자신감과 복종은 내가 괜찮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이것은 내려가는 것이라기 보다는 부양하고 자유로워지는 느낌이었다.

거장 음악가가 연주하는 것을 보면서 이와 똑같은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연주자가 악보나 주법 또는 다양한 테크닉을 계산하고 분석하기에는 그 모든 것이 매우 빨리 일어난다. 열린 마음으로 보고 듣게 된다면 연주자가 자신의 본질적인 지능에 빠져있고 몸과 음악이 자발적으로 흐르게 둠으로써 그 연주자의 포괄적인 상태를 감지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일출이나 일몰 때 내 집 주위에 있는 박쥐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은 이동하거나 먹이인 곤충을 잡거나 장애물을 피할 때에 빛과 같이 빠른 속도와 정확도로 움직인다. 때때로, 그들은 내 집안으로 날아들어와 별 이득 없이  휭하니 돌고, 먹이감을 찾고, 벽과 기둥, 지붕, 마루 (그리고 나)를 피해다닌다. 가끔 어떤 녀석이 곧장 나에게 날아오면 그것이 나를 칠 수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몸을 홱 숙이게 된다. 놀라운 사실은 박쥐는 시각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고주파의 소리를 방출하여  주위 물체에 부딫혀 돌아오는 소리 파장의 패턴을 민감한 귀로 감지하여 움직이는 반향위치측정(echolocation)을 통해 주변을 인지한다. 내가 박쥐를 볼 때면 그들의 놀라운 본질적인 지능과 자연이 이 생명체들에게 부여한 정교함을 관찰하느라 몹시 흥분하게 된다.

“Symbiotic” by Edward Foster

우리 인간도 역시 이러한 종류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지를 잊어버리고 있다. 나는 또한 우리가 이것을 매우 높은 수준으로 개발시키고 개선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상급의 통합된 아쉬탕가 수련자의 수련 흐름을 관찰하다 보면 주위 환경을 따르는 우아한 동물의 움직임과 유사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둘은 의식적 조작이 아닌 타고난, 통합된 지능의 장소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질적으로는 동일하다. 하이킹(또는 어떤 종류의 운동) 또는 음악과 같은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활동이 우리가 보다 손쉽게 내재된 본질적인 지능에 접근할 수 있게  거들어주는 반면 나는 통합된 요가와 명상이 이러한 인간의 본성의 층을 계발시키는 데에 특히 효과가 있는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고 믿는다.

아쉬탕가 빈야사 수련에 있어서 빈야사와 함께 신체와 호흡을 움직이는 기법은 신체움직임의 가장 깊고 미묘한 층 즉, 반다에 도달할 수 있게 해준다. 반다는 하이킹, 스포츠, 음악연주 등의 대부분의 체화된 형태의 활동을 통해 도달할 수 없다. 반다와 호흡의 육체적 상태에 접근하는 것은 통합과 본질적인 지능의 보다 심층으로 데려가게 되고 따라서 이러한 영역에서 아마도 아직까지 손길이 닿은 적이 없는 인간의 잠재영역을 깨우게 된다.  이와 유사하게 통합에 주안점을 두는 명상기법에서도 반다가 잡혀있는 정렬된 자세로 앉게 되면 마음은 유기적 조직의 최심층부의 미묘한 감각을 느끼도록 훈련되게 되고 또한  아직까지 손길이 닿은 적이 없는 인간의 잠재영역에 도달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의식의 변화된 단계로 이끄는 이러한 기법의 아이디어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이것이 우리를 보다 깊은 통합 상태와 우리의 본질적인 지능의 효과적인 심화로 이끌어 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기법들이 모든 사람들을 자동적으로 이러한 상태로 이끌어주는 것은 아니다. 의도가 반드시 함께해야 한다. 요가나 명상을 어떠한 독단적인 주장에 근거해 수련하거나 또는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실제 수련에 지속적으로 부과하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육체와 본질적인 지능을 구상화하고 비방하는 것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육체를 열등하다거나 또는 육체적 수련을 통해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수련을 통해 더욱더 통합되거나 민감해질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수련자들은 대개 자신의 육체와의 불협화음을 더 키우게 되고 자신의 본질적인 지능을 불신하거나 심지어 수치스럽게 여기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종종 자기신뢰 부족, 자기애 결핍 그리고 진정한 자신에 대한 이해부족 등을 보이게 된다. 자신의 수련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항상 독선이나 분투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고 자신의 느낌이나 개인적 경험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는 수련 전후의 만트라를 매우 성실하고도 헌신적으로 암송하는 반면, 그들의 수련을 관찰해 보았을 때 자기자신, 자신의 육체, 그리고 자신의 수련방법에 대한 감수성이나 믿음을 발견할 수 없는  수련자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러한 수련은 자신의 몸을 더욱더 불신하게 만들고 자신의 에너지를 어떠한  관념에 내어주게 된다. 이러한 수련자들은 대개 자신의 일상생활에도 매우 낮은 민감도를 보이게 된다. 수련을 육체적 민감도와 자각을 증대시키기 위해 사용하기보다는 육체를 따라 흐르는 독단적인 생각에 가로놓이는 동안 그들은 자신을 자신의 고유의 경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누군가가 수련과 연관된 철학이나 독단을 통해 의미를 찾게 되거나 그렇지 않거나 간에 ,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수련이 보다 통합되고 신체조직과 신경에 내재되어 있는  본질적인 지능에 복종하고자 하는  의도와 함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자기신뢰와 자기애 그리고 인류의 유산인 본질적인 동물적 지능을 포용하는 것으로 이끌게 된다. 만약 수련이 우리를 온전하도록 도와준다면 우리는 이러한 오랫동안 무시되어지고 잊혀졌던 인간다운 측면을 우리의 존재방식으로 다시 가져올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우리라는 동물로서 사랑하고 존중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뗄래야 뗄 수 없는 일부분이자 우리가 하나의 종으로서 우리의 생존과 수명을 의지하고 있는 나머지 지구를 어떻게 사랑하고 신뢰해야 할지를 다시 배우게 될 것이다.

인류에게 있어 완전한 수렵채집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오래 전에 우리의 뿌리를 떠났고 이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리고 지난 1만년 동안 인류 문화에는 우리가 떠날 수도 없고 떠나서도 안 되는 많은 아름답고도 훌륭한 아이디어들이 생겨났다.  나는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현재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하나의 종으로서 현재의 지구상에서의 입지와  현대적이고 대량 생산된 의식이 팽배한 상태에서의 개인 이 두 가지 측면에 있어 우리가 우리의 뿌리로부터 온전함과 수명이 더이상 가능하지 않은 상태까지 모두가 너무 멀리 떨어져 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요한 것은 인식의 극적인 전환이고 이것은 우리의 본질적인 지능과 동물적 지능이 우리의 생활과 존재로 다시 합체되는 것을 반드시 포함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아쉬탕가 빈야사 요가와 비파사나 영상과 같은 효과적인 통합적 수련이 이러한 과정을 돕는 매우 효과적인 도구라고 생각한다.

 

[1] 원제 ( Becoming Animal : Using Ashtanga Vinyasa Yoga and Meditation as Embodiment Practices for the Cultivation of Organic Intelligence)

[2] organic intelligence (본질적인/타고난/고유의 지능)

[3] tensegrity (긴장통합체) : 건축디자이너인 R. Buckminster Fuller가 tension integrity 라는 어구를 줄여 만든 신조어로, 벽돌로 쌓아 올린 담과 같이 지속적인 압축력에 의존하는 구조물과는 대조적으로, 구조물 전체에 걸쳐 지속적으로 파급되는 장력(tension)들의 균형에 의해 완전성을 유지하는 구조물들을 가리킨다.

 

번역: 이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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