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anne’s story – Yoga Sadhana for Mothers

밑의 내용은 Sharmila Desai와 Anna Wise께서 집필한 Yoga Sadhana for Mothers에서 발췌한 부분입니다. 발췌를 허락해 주신 Sharmila DesaiAnna Wise 두 분과 Pinter and Martin 출판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합니다. 이 책의 초판을 포함한 모든 저작권은 감옥에 수감된 임산부와 사회에 있는 여러 새로운 어머니들을 지지하는 Birth Companions 자선 단체에 기부합니다.

Joanne’s story

 

Darby and Joanne

조안 다비Joanne Darby

샨카라Shankara, 1980년 인도 마이솔

스칸다Skanda, 1984년 인도 고카르타

데릭Derick, 1992년 캐나다 몬트리올

의 어머니

큰아들이 벌써 서른 살이 넘었다. 요컨대 나의 임신과 출산을 되돌아보는 것은 요즘 세대의 요기들에겐 엄마나 할머니가 해주는 옛날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먼저 상황부터가 굉장히 특이했다. 나는 인도를 여행하는 중이었다. 1970년대의 인도는 지금과는 아주 달랐다. 텔레비전은 고사하고, 길에는 자동차도 몇 대 없었거니와, 바깥세상과의 교류도 힘들었던 시절이다(인터넷이나 휴대전화도 없었으니까!). 처음에는 여행객으로 있었지만, 몇 년 동안 인도와 아시아 등지를 떠돌아 다니며 나는 점점 이 나라의 영적 철학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신성함은 모든 곳에 깃들어 있었다… 거리에, 모든 이들의 마음에, 심지어 우리가 숨쉬는 공기에도. 나는 여러 신성한 장소들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고 삶이라는 신비에 답을 쫓아 이 아쉬람에서 저 아쉬람으로 옮겨 다니며 지내고 있었다. 마이솔에서 구루지를 만나 아쉬탕가 수련을 시작했던 당시에 난 영적 존재와 물질적 존재 사이의 어딘가를 ‘떠다니고’있었는데, 임신과 함께 나는 다시 땅으로 내려앉았다. 당시의 어떤 기억들은 굉장히 선명하지만, 수련에서 어떤 동작들이 더해지고 빼졌었는지 하는 그런 세세한 것들은 잘 기억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 가졌었던 감정들은 여전이 너무 선명하고 생생하다.

세 명의 사내아이들과 세 번의 출산, 모두 다 제각각 이었지만, 하나 하나 모두 나에겐 신의 축복과 같았다.

다비와 나에게 있어 함께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그것이 비록 생각지도 못했던 임신이었을 지라 해도, 항상 너무나도 멋지고 새로운 모험이었다. 우리는 마이솔에서 만났고, 일주일 간격을 두고 아쉬탕가 수련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수련에 푹 빠져있었고, 우리의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수련에 쏟아 붓고 있었다. 파타비 조이스는 우리의 구루였고, 우리는 그를 깊이 존경하고 사랑했다. 다비와 나는 친구이자 아쉬탕가 수련에 대한 열정을 함께 나누는 사이였다. 아이가 생길 때 마다 우리 둘 사이의 유대감은 더욱 강해졌고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깊이 아끼고 있다.

첫째 아들: 샨카라, 1980: 깜짝 선물!

요가 수련을 한지 일년 정도 됐을 때였다. 우리는 마이솔에 살면서 매일같이 샬라에 가서 구루지의 지도 아래 강도 높은 수련을 하고 있었고, 새로운 동작들을 배워나갔다. 나는 완전히 열정적으로 이 수련과 사랑에 빠져있었다.

구루지는 여성의 생리휴가에 관해 굉장히 엄격했다. 사라스와티께서 매달 그날이 되면 우리 집(그들의 집 바로 옆에 붙어있었던)으로 와서 샤워를 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월경주기가 돌아올 때면 나는 수련을 접고 사흘이 지나가기만을 인내하며 기다려야만 한다는 게 너무 아쉬웠다. 문데이는 또 달랐다. 그날은 다비와 함께 차문디 언덕Chamundi Hill으로 나들이를 가거나, 새로 수련하러 온 이들이 있으면 함께 야외로 놀러 나가는 즐거운 날이었다.

내 첫 임신은 아주 특별했다. 마치 시바신께서 농간을 부리거나, 나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현실이라는 것으로 나를 가둔 것 같이 느껴졌다.

임신 첫 달 생리기간의 첫날에 약간의 피가 비쳤고, 나는 그저 그게 다라고 생각했다… 그냥 양이 적은 월경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평소대로 사흘의 휴식을 가졌다. 당시 다비는 인도 북부로 여행을 떠나고 없었다.

둘째, 셋째 달이 돌아와도 월경은 오지 않았다. 다비가 없는 상황에서 나는 내가 임신을 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저 내가 운동선수 신드롬Athlete’s syndrome(여성이 너무 심하게 육체적 훈련을 할 때 생리가 끊기는 현상)을 앓고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임신 삼 개월째에도 나는 아무런 증상을 느낄 수 없었다. 다비가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나의 불룩한 배를 알아보았고 바로 나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다비는 내가 계속 변비증상이 있는 것 같다고 했던 것을 가지고 여전히 놀리곤 한다. 의사선생님은 내기 임신 4달째가 넘어가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충격 그 자체였다.

다음날 나는 구루지와 암마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구루지는 무서운 표정으로 물었다. ‘누가 아빠냐?’ ‘다비요.’내가 대답했다. ‘그럼 너희 둘은 결혼을 한다!’ 그가 말했다. 구루지는 별자리를 보고 길일을 정한 후 그의 집에서 결혼식을 올려주었다. 아주 전통적인 결혼식이었고, 우리는 영원히 서로를 떠나지 않을 거라는 서약을 했다.

수련에 관해 걱정을 하자 구루지께서 말씀하셨다, ‘계속 한다!’ 사라스와티가 다니는 산부인과에 검진을 갔을 때 의사선생님께서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은 ‘요가 수련하던 것을 그만두세요, 휴식을 취해야만 해요.’였다. 구루지께 대한 믿음이 훨씬 깊기에, 서양인이 그녀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아마 의사선생님은 몰랐을 것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수련을 계속했다.

구루지께서 임신한 여성을 지도한 경험은 그때까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어떤 아사나를 하지 말아야 하는지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암마께서도 그에게 조언을 해주셨던 것 같다, 종종 그녀가 문간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구루지의 짧은 영어 때문에 깊은 대화를 할 수 는 없었다.

그래서 매일 아침 나는 매트 위에 섰고, 구루지께서 어떤 동작을 빼고 더할지 지도해 주셨다. 나의 등은 한껏 열려있었고, 깊은 백밴딩을 많이 했었는데 아주 기분이 좋았다. 시르시아사나를 한 시간 넘게 해왔기 때문에 그것도 계속 했다. 이 동작이 내 수련의 하이라이트였다. 수련을 하는 것이 너무 행복했고 수련을 할 때 컨디션도 좋았고 힘차게 느껴졌다. 구루지께서는 점점 더 명상적인 자세들을 주셨고(시다사나 같은 것들), 각각의 자세들에서 더 깊은 호흡을 하라고 지도해주셨다. 나는 수련을 하는 것이 아기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고, 진심으로 내가 수련을 하면서 느끼는 행복감과 호흡으로 인한 긍정적인 에너지가 아기에게 도움이 될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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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진통이 왔을 때는 저녁 무렵이었다. 진통은 아주 느리게 진행됐다. 암마와 사라스와티가 와서 상황을 보고 좀 더 시간이 걸릴 거라고 우리를 안심시켰다. 다음날 이른 아침 병원으로 가기 위해 다비가 릭샤를 불렀다. 릭샤는 아주 천천히 달렸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병원문은 잠겨있었고 아직 아무도 없었다. 청소부가 나와 다행히도 병원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그 뒤 의사가 도착했다. 의사선생님께서 깜짝 놀라셨다. 그녀는 웃으며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비와 사라스와티에게 말했다. ‘아기가 스푸트니크(세계 최초의 구 소련 인공위성)만큼 빨리 나왔어요.’ 샨카라는 아주 아름답고 건강한 4kg의 사내 아이였다. 보통 인도에서 하는 대로 나는 며칠을 더 병원에 머물렀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몇몇의 아사나들을 천천히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구루지께서는 내게 휴식을 취할 것을 고집하셨고, 세 달 동안은 오직 아주 가벼운 수련만 하게 하셨다. 그리고 한동안 미국으로 떠나셨는데, 구루지께서 다시 돌아오셨을 때 샨카라는 4개월이 되어있었고 나는 임신 전 하던 수련으로 되돌아가있었다.

둘째 아들: 스칸다, 1984: 준비된 임신

그 당시 나는 어드밴스드 시리즈들의 거의 모든 동작들을 연습하면서 아주 난이도 높은 수련을 하고 있었다. 다비는 둘째 아이를 원하고 있었고, 사라스와티도 샨카라가 동생이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나는 확신이 없었지만 결국은 설득을 당했다. 그렇게 결정하자마자… 아이가 생겼다…

이번엔 구루지께 첫째 달부터 말씀을 드렸고, 그는 ‘확실하게 하기 위해 3달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어드밴스드 시리즈 수련과 머리서기 한 시간을 계속했다. 넉 달째가 되자 샨카라를 가졌을 때보다 배가 훨씬 많이 나와있었다. 그래서 빠르게 난이도를 낮춰야만 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도 둘째 임신 소식을 알렸는데, 그들은 내 재정상태도 좋지 않고 하니 내가 캐나다로 돌아오길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고카르나Gokarna로 가기로 했다. 물가도 훨씬 싸고 바다와 조용한 삶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고카르나는 다비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었는데, 너무나 아름다운 해변과 사찰들이 있는 아주 성스러운 시바신의 마을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넉 달 동안은 신과 영적인 수련을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굉장히 특별한 환경에서 수련할 수 있었다. 다비는 우리의 오두막집 주변에 아주 부드러운 진흙으로 바닥을 만들었다. 우리는 코브라와, 전갈 그리고 다른 많은 징그러운 파충류에 둘러싸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요가 수련장을 최대한 깨끗이 유지해야만 했다. 하루는 머리서기를 하고 있는데, 샨카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꽃게다, 꽃게다.’ 나는 당장 아이에게 달려갔고 커다란 전갈이 그를 노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행히도 우리는 항상 준비되어있었다… 주변에 막대기를 상시 대기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요가 수련은, 여전히 내 아침 일정의 가장 큰 부분이었다. 나는 구루지께서 첫 임신 때 가르쳐주신 것과 비슷한 루틴으로 수련했다. 수리야나마스카라와 스탠딩 자세들을 하고, 프라이머리와 인터미디어트, 어드밴스드 시리즈들에서의 여러 자세들을 수련했다. 그리고 나만의 길고 긴 머리서기 한 시간과 명상 자세도 계속했다. 매일 시바 경전과 바가바드기타도 읽었다. 우리의 수련을 방해할 아무것도 없었다. 정글이 우리의 뒤뜰이었고, 앞마당에는 해변과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전기도 안 들어오고 이웃도 없었다. 이런 외딴곳에 살면서도 나는 한번도 걱정을 해 본적이 없었다. 나는 모든 믿음과 확신을 시바신의 손에 맡겨놓고 있었다. 나는 시바신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고 계신다고 확신하고 있었고, 나의 출산도 우리를 둘러싼 환경만큼이나 아름다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그랬다!

2월 9일 오후 6시, 첫 진통이 왔을 때 난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다비는 우리가 살던 곳의 농부에게 산파를 불러달라고 부탁하러 갔다. 내가 우리 진흙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갑자기 수백 마리의 나방들이 나무문 밖으로 날아왔고, 새들을 하나 가득 유인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수없이 많은 색색의 아름다운 새들이 오두막 앞에서 원을 그리며 날면서 행복하게 지저귀고 있었다. 나는 자연이 내게 주는 이 광경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진통의 아픔을 싹 잊을 수 있었다. 산파가 도착하자마자 아기가 나오기로 마음먹었었나 보다. 아기를 씻기기 위해 뜨거운 물을 끓일 시간도 없었다. 아기가 나왔을 땐 9시였다, 첫 진통을 하고 세시간 후였다.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은 동네사람들은 북을 치기 시작했고, 나는 밤새 내내 골짜기에 울려 퍼지는 북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너무나도 특별한 밤이었다. 당시 시브라트리(마하시브라트리, 힌두교 축제)가 다가오고 있었고, 고카르나는 유명한 시바신의 마을이었기 때문에 많은 서양인들이 마을에 모여들고 있었고 다른 서양인이 아기를 출산했다는 소문을 듣자 우리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작은 선물을 가져다 주었다. 우리는 전 세계에서 온 손님들을 맞았는데, 이것은 마치 나의 믿음에 대한 시바신의 축복 같았다.

석 달 후 우리는 캐나다로 돌아가 친정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덕분에 어머니께서 아이들을 봐주시는 동안 나는 수련에 완전히 집중할 수 있었고, 몇 달 만에 천천히 평소의 수련으로 돌아왔다.

셋째 아들: 데릭, 1992: 캐나다의 병원에서

당시 나는 가족들을 돌보아야 했고, 동시에 생활비에 보태기 위해 약사로도 일하고 있었다. 강도 높은 수련을 하기에는 너무 바빴기 때문에 짧고 기본적인 수련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임신을 했을 때 난 42살 이었다. 그 나이에 임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지만, 아이가 생겼다! 나의 온 정신은 일, 요리, 청소, 아이들의 숙제나 운동 같은 일상적인 문제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임신이 확실해지자,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매일 하던 평소 수련으로 돌아갔다, 물론 너무 과하지 않게. 대부분 프라이머리 시리즈의 스탠딩과 변형된 자세들이었고, 피니싱 자세들과 짧은 머리서기로 마무리했다. 임신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처음으로 나는 보통 병원에서 출산했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상황은 전혀 달랐다. 병원에 가야 할 시간이 됐을 때는 자정이었다. 간호사는 내가 아침까지 출산을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의사선생님을 부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깜짝 놀랄 정도로 예상보다 훨씬 빨리 분만이 진행됐다…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의사는 없었다, 간호사 몇몇과 한번도 분만을 집도해본 적이 없는 의과학생들뿐이었다! 신께 감사하게도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그 후 몇 년간은 일을 그만두었고 예전에 하던 수련을 할 수 있었다.

폐경기

한마디로 말하면, 난 몇 단계에 걸쳐 이 시기를 겪었다.

나의 초기 폐경은 내가 50살이 되던 해에 시작됐다. 다행히도 난 다른 여자들에 비해 증상이 거의 없었다(불규칙적인 월경 정도였다). 51세가 되던 해, 나는 다시 구루지와 수련하기 위해 가족들과 마이솔로 돌아갔다. 샬라에서 매일 수련을 하고 한달 후, 나의 월경을 끊겼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게 내 폐경기의 끝이었다. 그 후 어떤 다른 증상도 없었다. 정말 흥미롭게 생각한다. 요가 수련을 해온 덕분일까, 그저 자연스러운 증상인 걸까? 잘 알 수는 없지만,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폐경으로 애를 먹는 경우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엄마로서, 나는 요가에 대한 나의 열정을 아이들과 함께 나누었다. 신체적인 면에서뿐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서도 말이다. 2001년 가족 모두와 인도로 다시 돌아와 함께 여행했다. 우리는 아이들이 어디서부터 요가 철학의 뿌리가 시작되었는지 알 수 있길 바랬고, 그들이 태어난 곳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이들 모두 이 여행을 좋아했다. 가족으로서, 우리는 열린 마음과 보살핌, 사랑을 가지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한다. 아이들은 우리의 길을 따를 수도 있고 그들 자신의 길을 각자 갈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그들을 사랑한다.

평생 동안, 구루지를 만나고, 그에게 아쉬탕가 요가를 배우고, 이 요가를 30년 넘게 수련할 수 있었던 것에 굉장히 그리고 진심으로 감사해왔다. 육체적으로는 나를 단단하게 하고 건강 할 수 있게 해주었고, 정신적으로는, 인생의 여러 많은 일들 앞에서 좀 더 차분한 태도를 가질 수 있게, 영적으로는, 항상 올바르고 정직한 길을 따르도록 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나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구루지께서 항상 하시던 말씀을 여전히 믿고 있다… ‘99퍼센트의 수련, 1퍼센트의 이론.’

 

Hari Om Joanne

번역: 주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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